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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와 장생탄광(1)

by 도생(道生) 2017. 7. 22.

일제강점기 해저탄광 갱도붕괴로 바다 밑에 수장(水葬)된 

조선인 강제징용(강제노역) 피해자와 장생탄광 - (1)

 

 

 

 

 

 

 

 

 

 

 

 

 

석탄산업은 조선과 철강 등과 함일본의 산업 혁명을 주도했던 근대화의 상징이다.

석탄산업은 일본 제국주의가 군사 대국화와 팽창주의 과정에서 일본 근대화의 기반이 된 산업 중 하나다.

산업근대화를 이룬 일본은 주변국을 침략하는 군사적 목적의 전쟁에 이용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강제징용 피해자는 석탄산업뿐만 아니라 조선과 철강산업을 비롯한 공사장, 벌목장, 군수기지 건설 현장 등 인력이 필요한 거의 모든 분야에 노무자로 강제동원됐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군수물자를 동원한 일본 제국주의는 모든 산업 분야에서 안전보다는 생산량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사고로 목숨을 잃은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도 많다.  

 

 

 

 

 

 

 

 

 

 

 

 

일본 제국주의가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하고 나서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일(渡日)한 조선인도 많았다.

일제강점기 자진 도일한 조선인 역시 강제징용 피해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대도시와 지방에서 군수 산업공장과 탄광 등 최악의 노동 조건 속에서 노역에 시달렸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강제노역한 곳들은 일본인도 기피하는 위험하고 힘든 작업현장뿐이었고, 일본인은 작업을 감독하거나 위험하지 않고 수월한 곳에 배정되어 작업했다.

 

 

일본의 국민 총동원령은 일본과 일제의 식민지였던 조선인을 일본군 강제징집과 학도병, 군속(군무원), 강제징용(강제노역), 일본군 위안부 등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소모품과 도구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해저탄광 장생탄광은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60km 남짓 떨어진 야마구치 현 우베 탄전 지역에 있다.

장생탄광이 위치한 야마구치 현 우베 지역은 50여 개의 탄광이 몰려 있었기 때문에 사고도 자주 발생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에 의해 강제연행되어 끌려간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수몰 사고가 난 장생탄광뿐만 아니라 지역을 불문하고 공통적으로 일어났던 일들이 있다.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는 일본인에게 일방적으로 차별과 학대, 폭행을 당했으며, 열악한 생활과 작업환경으로 여러 질병에 시달렸으며, 배고픔과 영양실조, 탈출과 사고사 등이 자주 발생했다.

 

 

 

 

 

 

 

 

 

 

일본 본토뿐만 아니라 중국과 만주, 남태평양과 동남아시아 등지로 끌려간 조선인 강제징용 노무자들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일본인에게 노예보다 못한 차별을 받으며 혹독한 조건에서 중노동에 시달렸다.

 

 

너무나도 열악한 작업 환경에서 폭행과 극심한 노동에 시달리던 조선인 강제징용 노무자들이 탈출하다가 걸려 엄청난 폭행을 당하다가 죽어간 사람도 많았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 강제징집 피해자들은 일본이 저지른 전쟁에 강제로 끌려가 이역만리 타국에서 쓸쓸하게 죽어갔다.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 도코나미 해안에 있는 해저탄광인 장생탄광(조세이탄광)은 일본의 해저탄광 중 하나다.

장생탄광에는 먹고살기 위해 자진하여 도일(渡日)한 조선인 노무자도 있었지만, 대다수 조선인 노무자는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사람들이었다.

 

 

 

일제강점기 국민 총동원령이 한창 시행되던 1942년 2월 3일 오전 9시경 일본에 의해 강제동원된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136명이 해저탄광인 장생탄광이 수몰되면서 어두운 바다 밑 석탄 갱도에 갇혀 생을 마감했다.

 

 

장생탄광 수몰 사고로  자진 도일(渡日) 조선인과 강제징용 조선인 노무자 136명과 일본인 등 183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조선인 희생자는 10대부터 50대까지 연령대로 이 중 20대 희생자가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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