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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한민족9천년 역사)

일제 식민사학과 한국사신론의 저자 이기백

by 도생(道生) 2019. 3. 23.

일제 식민사학을 추종하면서 일본 제국주의 식민사관을 극복했다고 주장하는 강단사학

한국 고대사 왜곡의 원흉 쓰다 소키치와 이병도로부터 배운 한국사신론의 저자 이기백

 

 

 

 

 

 

 

 

 

 

 

 

여주 이씨 남강 이승훈(1864~1930) 선생은 1919년 3.1만세 혁명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강연에 큰 감명을 받은 남강 이승훈 선생은 사업을 하며 번 돈으로 1907년 평안북도 정주에 중등교육기관 오산학교를 설립한 독립운동가입니다.

 

 

여주 이씨로 한국사신론의 저자 이기백(1924~2004)은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1941년 오산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이기백은 60년 차이가 나는 남강 이승훈 선생이 6촌 종고조부가 된다고 주장하면서 집안에 족보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남강 이승훈 선생의 고손자(현손) 이기대(1952년생) 선생은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란 사실을 숨기고 지내다가 1984년 남강문화재단이 설립될 때 유족 대표로 참석하면서 본인이 남강 이승훈 선생의 고손자(현손)임을 밝혔습니다.

 

 

 

 

 

 

 

 

 

 

이기백의 주장대로라면 남강 이승훈 선생의 고손자(현손) 現 남강문화재단 이사 이기대 선생과 이기백은 같은 항렬로 10촌 4종형제가 됩니다.

 

 

남강 이승훈 선생의 고손자인 이기대 선생은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고생스럽게 살아온 반면, 이기백은 고생을 모르고 살아왔으며 그의 아버지와 조부와 고조부 등 이기백의 집안은 독립운동을 한 사실이 없기 때문에 이기백은 절대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될 수 없습니다.

 

 

일제 식민사학을 하늘처럼 떠받들고 살면서 역사작가라고 주장하는 초록불의 잡학다식(이하 초잡식)이 이기백이 민족사학계로부터 일제 식민사관을 추종한 식민사학자라고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잡식은 불순하게도 일제 식민사학을 추종한 이기백과 독립운동가인 남강 이승훈 선생을 연관 지으려 했습니다.

초잡식은 모 신문사에 기고한 글에서 '이기백이 독립운동가 남강 이승훈의 집안이며 민족학교인 오산학교 출신이라는 것은 고려의 여지도 되지 않는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일제 식민사학을 그대로 옮겨 놓은 <한국사신론>의 저자 이기백의 삶과 남강 이승훈 선생의 독립운동과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한국사신론>의 저자이며 일제 식민사학을 추종한 이기백이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설립한 오산학교 출신이라고 해서 일제 식민사학을 바탕으로 우리 역사를 왜곡한 것 사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초잡식의 주장대로라면 1910년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해 오산학교 교가를 작사한 이광수가 오산학교 교사 출신이고 오산학교 교가를 작사했기 때문에 친일파가 아니란 주장을 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우리 근현대사만 봐도 한 집안에 독립운동과 친일행위, 군인과 북한에 부역한 인물 등이 있듯이 각자의 행위에 공과가 있고 평가를 다르게 해야 하는 것이 옳은데도 불구하고 자칭 역사작가란 자가 이기백의 역사 왜곡 만행을 독립운동가 남강 이승훈 선생의 삶을 우산 삼아서 비난을 피하려 한 것입니다.

 

 

또 초잡식은 이기백이 이병도의 제자라는 멍에 때문에 일제 식민사학을 추종하는 친일파라는 일방적으로 비난 받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기백이 직접 말한 내용을 토대로 이기백이 단순히 이병도의 제자여서가 아니라 이기백의 삶의 족적 자체가 일제 식민사학을 추종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사신론>의 저자 이기백은 자신의 선친이 한글로 쓰인 책을 많이 수집해서 책을 많이 읽었다고 주장했고, 자신의 선친이 '그 나라의 말과 역사가 아니고는 그 민족을 깨우칠 수 없다.'라는 말을 늘 해줬다고도 주장했는데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한국사신론>의 저자 이기백은 남강 이승훈 선생의 민족정신이 자신이 역사학자로서의 길을 가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기백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와세다 고등학원과 와세다대학 사학과에 입학할 것이 아니라, 마땅히 독립운동가로부터 우리의 자주적 역사를 배우고 독립운동에 투신했어야 합니다.

 

이기백의 일본 유학은 남강 이승훈 선생과 전혀 상관없고, 어린 이기백과 그의 아버지 생각이 일치했기 때문에 일본 유학길에 오른 것입니다.

 

 

 

 

 

 

 

 

 

 

이기백이 선택한 학교는 우리가 쓴 우리 역사를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일본인이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조작하고 말살한 일본이었습니다. 이기백이 선택한 곳은 바로 이병도가 쓰다 소키치에게 식민사학을 배운 일제 식민사학의 심장부 와세다대학 사학과입니다.

 

 

다시 말해 이기백은 아버지가 민족주의자였고, 남강 이승훈 선생의 민족정신을 영향 등 집안과 주변 환경으로 인해서 본인이 역사학도의 길을 가게 됐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아버지와 남강 이승훈 선생이 걸어갔던 정반대의 일제 식민사학자의 길을 갔습니다.

 

 

초잡식은 함석헌과 신채호 선생이 이기백에게 가장 영향을 끼쳤던 사람이었다고 주장하면서 마치 이기백이 일제 식민사학과 관련이 없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기백은 초잡식의 주장과는 반대로 함석헌과 신채호 선생을 비판했습니다. 사실을 왜곡하고 조작하는 초잡식의 언행을 보면 일제강점기 우리 역사를 왜곡 조작한 일제 식민사학과 쌍둥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일제 식민사학을 추종한 <한국사신론>의 저자 이기백은 함석헌 선생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를 감명 갚게 읽었는데, 역사를 종교적 또는 도덕적으로 풀이하는 것이 문제라고 비판했습니다.

 

 

또 독립운동가이며 민족사학자인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 쓰신 <조선사연구초>에서 <천년래 제일대사건>을 아주 감명 깊게 읽었다고 했습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 말한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은 묘청의 난을 말하는 것인데, 일제 식민사학을 추종하는 주류 강단사학과는 전혀 다른 관점으로 본 사건을 말합니다.

 

 

 

 

 

 

 

 

 

 

이기백은 신채호 선생의 역사를 나와 남의 투쟁으로 인식한다면 학문의 보편성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고 신채호 선생의 자주적 역사관을 가치 없는 학문, 편향된 학문이고 비판했습니다.

 

 

이기백의 함석헌 선생과 신채호 선생을 비판한 것은 자신이 와세다대학 사학과를 갈 수밖에 없었다는 명분을 내세운 것입니다.

 

 

이기백이 세상을 떠나기 몇 해 전에 한 말로 일제 식민사학을 신봉하는 자가 민족사학을 대표하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민족주의 역사관에 대해 평생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 당시는 일제의 민족말살정책과 수탈과 착취가 정점에 달했던 시기로 대한의 백성들이 모두 어렵게 살던 때였습니다.

 

 

<한국사신론>의 저자 이기백은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길에 올라 1941년 일본 와세다 고등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에 들어왔을 때 이병도를 만난 후 1942년 와세다대학 사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이기백은 일본 와세대대학 사학과에 입학하기 전 이병도를 만났습니다.

1942년 와세다대학에 입학해 우리 역사를 왜곡 조작한 원흉 일제 식민사학자 쓰다 소키치가 당시 학생들로부터 대단한 존경을 받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기백은 쓰다 소키치가 주도한 연구 발표회에 늘 참석했고, 쓰다 소키치가 쓴 책을 읽으며 식민사학으로 조작한 가짜우리 역사를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1944년 이기백은 와세다대학 사학과를 휴학하고 한국에 돌아온 이기백은 1945년 6월 일본 관동군에 입대하기 전까지 이병도를 몇 차례 찾아갔고 그의 논문을 읽었다고 말했습니다.

 

 

1946년 봄 3.8선을 넘어 서울로 들어온 이기백의 집안이 경제적으로 얼마나 넉넉했는지 몰라도 일본 유학에 이어 중국 유학을 준비했다고 했으며, 당시 국공내전 때문에 중국 유학을 포기하고 앞으로의 진로를 상의하기 위해 이병도를 찾아갔다고 했습니다.

 

 

 

 

 

 

 

 

 

 

일제 식민사학을 그대로 옮겨 놓은 <한국사신론>의 저자 이기백은 식민사학의 태두 이병도가 재직하고 있던 서울대 사학과 3학년에 편입했는데, 당시 어지러운 상황 때문에 학과 수업을 제대로 받지 않은 상태에서 1947년 논문 한 편으로 서울대 사학과 졸업장을 받았습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한 민족주의 역사학자의 역사관은 잘못된 것으로 생각한 이기백이 배운 역사는 이병도의 일제 식민사학과 또 본인이 와세다대학 사학과에서 배운 식민사학, 그리고 쓰다 소키치 등으로부터 배운 일제 식민사학이 전부입니다.

 

 

광복 후 일제 식민사학의 결정체가 등장했는데, 이병도의 <조선사대관>(한국사대관)과 이기백의 <한국사신론>입니다.

스승 이병도와 제자 이기백은 일본 제국주의 와세다대학 사학과에서 배운 일제 식민사학으로 무장하고 일본인이 만든 가짜역사를 바탕으로 책을 썼으며 후학을 가르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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