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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한민족9천년 역사)

이기백의 한국사신론

by 도생(道生) 2019. 3. 24.

일제 식민사관(식민사학)에 의해 거짓과 오욕으로 점철된 한국 역사

일제가 왜곡 날조한 한국사를 글 장난으로 세탁해 옮긴 이기백의 <한국사신론>

 

 

 

 

 

 

 

 

 

 

 

 

한국사신론의 저자 이기백에 대한 주류 강단사학계의 평가는 칭찬 일색입니다.

이기백이 일제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자주적인 관점에서 민족사학을 개척하여 새로운 한국 역사학을 수립했다고 주장합니다.

 

 

신민족주의 역사학의 길을 열었다는 이기백이 일제 식민사학을 그대로 추종하면서 한편으로 민족주의 사학을 대표하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자주적 민족주의 역사관을 비판하고 폄훼했습니다.

 

 

이기백은 1942년 이병도를 처음 만난 이후 일본 와세다대학 사학과에서 공부할 때 쓰다 소키치가 당시 학생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다고 주장하며 그가 쓴 책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이기백은 우리 역사조작의 원흉 쓰다 소키치가 주도한 연구발표회에 늘 참석했으며, 1944년 와세다대학 사학과를 휴학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이병도를 다시 만났습니다.

 

 

 

 

 

 

 

 

 

 

1945년 6월 20일 일본 관동군에 입대했던 이기백은 1946년 봄 한국 역사학의 태두(泰斗) 이병도를 찾아가 진로 상담을 했습니다.

 

1946년 이병도가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서울대 사학과 3학년에 편입한 이기백은 미 군정의 국립서울대학교 통합 정책으로 인해 학과 수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고, 결국 논문 한 편으로 1947년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합니다.

 

서울 배재와 용산중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친 이기백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군에 입대했고 중위 계급장을 달고 육본 편찬위원회에서 복무 중 육군사관학교 교수가 됩니다.

 

 

일제 식민사관으로 무장한 <한국사신론>의 저자 이기백은 1956년 대위로 제대하고 홍대, 단국대, 서울공대 등지에서 시간강사를 하며 지내다 1958년 이화여대 사학과 조교수가 됐습니다.

 

 

 

 

 

 

 

 

 

 

1961년 이화여대 사학과 조교수로 재직하던 이기백은 일제 식민사관을 추종하는 주류 강단사학계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한 한국 역사학을 대표하는 한국사 개설서 <국사신론>을 출간합니다.

 

 

이때까지 이기백이 배우고 습득해 가르친 한국 역사는 와세대대학 사학과에서 배운 식민사관(식민사학), 이병도의 가르침, 쓰다 소키치의 쓴 책 등으로 모두 일제 식민사관의 찌꺼기들 뿐입니다.

 

 

1963년 서강대 사학과 교수가 된 이기백은 1966년 미국 하버드대 연구소에서 1년간 있으면서 <국사신론>의 개정판 <한국사신론>을 1967년에 내놓습니다. (하버드대 연경연구소는 하버드대학교와 중국 연경대학교가 자매결연을 하고 학문적 교류를 한 연구소였지만,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한국, 일본, 대만의 학자를 초청해 연구 활동을 했습니다.)

 

 

 

 

 

 

 

 

 

 

일제 식민사관을 추종한 <한국사신론>의 저자 이기백은 당시 미국에 한국 역사와 관련된 사료와 자료가 많아 <국사신론>을 <한국사신론>으로 개정판을 낼 때 참고했다고 했습니다.

 

 

이기백이 참고한 미국에 있는 역사 사료와 자료는 우리의 손으로 쓴 역사를 번역한 것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이 만든 역사 자료를 번역한 것입니다.

 

 

중국의 역사는 춘추필법의 역사라 많은 사람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고, 일본의 역사 자료는 우리 역사를 왜곡 조작한 일제 식민사관 이론입니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일제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가 우리 역사를 왜곡 조작할 때 중국 측 사료에서 필요한 부분만 선택해서 식민사학을 완성했습니다.

 

 

 

 

 

 

 

 

 

 

일제 식민사관으로 오염된 주류 강단사학계는 이기백의 <한국사신론>은 이병도의 <조선사대관>(한국사대관)이 넘지 못한 일제 식민사관의 벽을 허물었다고 주장합니다.

 

 

이기백의 <한국사신론> 서문 中

"한국사의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우리가 힘써야 할 일들이 많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우선적인 과업은 식민주의 사관을 청산하는 일이다. 식민주의 사관은 한마디로 말하면 일제의 한국에 대한 식민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한 왜곡된 한국사관이다."

 

 

일제가 대한제국 강제병합의 당위성과 영구지배를 위한 목적으로 학문적 이론을 만든 것이 식민사학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왜곡 조작 말살한 일제 식민사학 이론은 대부분 고대사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기백이 <한국사신론>에서 일제 식민사관(식민사학)을 극복해야 한다고 강변했는데, 정작 <한국사신론>은 일제 식민사관을 극복한 듯한 착각이 들게 하는 현란한 글 장난으로 국민을 속였습니다.

 

 

 

 

 

 

 

 

 

 

일제의 반도사관, 위만조선과 한사군 한반도설,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 등 한국 고대사 조작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기백의 <한국사신론>은 현란글 장난으로 만들어진 일제 식민사관을 답습한 잡서에 불과합니다.

 

 

혹자는 이기백이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에 대해 수정론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었다고 주장하는데,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기백은 현란한 말장난과 글 장난을 동원해 대외적으로는 일제 식민사관을 극복한 것처럼 행동하지만, 그가 쓴 책과 강연 내용은 이기백이 일제 식민사관으로 무장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기백의 한국사신론은 식민사관의 노예역사관을 대한민국 국민에게 심어준 일제 식민사학의 잔재입니다.

 

 

 

 

 

(교육방송 다큐 시선 - <우리 곁의 친일 잔재> 캡쳐)

 

 

 

 

"쓰다 소키치가 교수로 있던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였던 이병도(1919년 졸업)와 손진태(1927년 졸업)를 주목하게 된다. 일본과 한국의 연구자들이 내연관계를 갖게 된 데에는 바로 이런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1945년 이후 두 사람이 주도하여 만들어 낸 한국고대사 체계에는 원천적으로 태생의 문제가 있었던 사실을 짐작하게 된다.

 

이병도는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국사 교사를 훈련시켰고, 1946년부터 서울대학교에서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그는 1954년에는 학술원 회원이 되었고 1955년에는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며 1960년에는 문교부 장관, 학술원 회장이 되었다.

 

손진태는 1945년 서울대학교 교수, 1949년에는 문교부 차관 겸 편수국장을 역임했다, 자신들이 문교부 장관과 차관을 지내며 한국사의 연구와 교육을 장악하고, 그들이 일본에서 배워 온 연구 관행을 한국 학계에 뿌리내리게 했던 것이다."

(이종욱 서강대 사학과 교수 출신의 前 서강대 총장의 『역사 충돌』 中)

 

 

손진태는 한국전쟁 때 납북됐고, 이종욱 명예교수는 스승 이기백을 포함해 서울대학파를 공개적으로 비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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