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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시조 온조왕과 13대 근초고왕과 마지막 왕 의자왕과 삼천궁녀

by 도생(道生) 2020. 5. 26.

<광주 환단고기 북콘서트> - 3부 백제(百濟), 우주 광명문화를 꽃 피우다.

고주몽과 소서노의 아들 백제의 시조 온조왕과 13대 근초고왕과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과 삼천궁녀



















단군왕검의 옛 조선(고조선)을 계승한 북부여의 시조는 해모수 단군입니다. 북부여의 역사는 단군왕검의 고조선과 고구려의 시조, 백제의 시조, 신라의 시조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한국사의 잃어버린 역사 고리입니다. 



소위 '해모수 신화'와 ', '주몽 신화'는 해모수 단군께서 고구려의 시조이신 고주몽 열제의 아버지로 왜곡되어 있는데, 북부여를 건국한 해모수 단군과 북부여를 계승하여 고구려를 건국한 고주몽 열제는 고조할아버지와 손자(현손玄孫)의 관계입니다.



해모수 단군과 고주몽 열제는 고조부(高祖父)와 손자(孫子)의 관계인데, 부자(父子)의 관계로 무지막지하게 왜곡했습니다.

더욱이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 성제와 소서노 사이에서 태어난 친아들 비류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의 천륜(혈통) 관계는 아예 끊어버렸습니다.




북부여는 1대 해모수 단군부터 6대 고무서 단군까지 181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북부여의 시조 1대 해모수 단군부터 4대 고우루 단군까지는 같은 혈통이고, 5대 고두막(동명성왕)과 고무서 단군은 다른 혈통입니다.



북부여 시조 해모수 단군부터 4대 고우루(해우루) 단군까지가 전기 북부여이며, 5대 고두막(동명성왕) 단군과 6대 고무서 단군까지를 후기 북부여입니다.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의 시조는 모두 북부여 단군의 혈통입니다.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 열제는 해모수 단군의 고손자입니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고구려의 시조이신 고주몽 열제와 소서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입니다. 소서노는 북부여 6대 임금이신 고무서 단군의 따님입니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는 북부여 5대 임금이신 고두막(동명성왕) 단군의 딸 파소(선도산 성모)입니다.
















고구려를 떠난 소서노는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데리고 중국 하북성 난하 인근의 패대 땅에 나라를 세웠는데, 이때 고주몽 열제께서 '어하라'라는 왕의 칭호를 내려줬습니다. 이곳이 백제 건국의 시원지이며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얼마 후 한반도로 옮겨와 백제를 건국합니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봄가을에 우주의 통치자이신 상제님께서 천제(天祭)를 올렸고, 북부여 4대 임금이신 고우루 단군 때 침략한 한漢나라 무제의 군사를 격퇴하고 북부여 5대 단군이 된 고두막(동명성왕) 단군의 사당을 지어 놓고 제사를 올렸습니다.



백제의 13대 임금 근초고왕은 백제의 전성기를 이끈 왕입니다. 고구려는 당시 가장 넓은 영역의 영토를 가지고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나라였습니다. 백제 13대 왕 근초고왕은 태자와 함께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했는데 고구려 16대 임금인 고국원왕이 전사했습니다. 




백제의 13대 왕 근초고왕은 영토 확장을 위해 고구려뿐만 아니라 가야 원정도 했는데, 일제 식민사학은 일본의 신공왕후가 신라와 가락국을 정벌하고 약 200년 동안 한반도 남쪽 일부를 지배했다고 주장합니다. 일본은 소위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며 백제 13대 근초고왕이 일본의 한반도 정벌을 기뻐하며 영원히 일본에 조공을 바치겠다는 서약을 했다고 주장합니다.



일제 식민사학과 대한민국 주류 강단사학계는 소위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주장하며 고구려 제6대 태조왕, 백제 13대 근초고왕, 신라 17대 내물왕 이전의 역사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을 내세워 한국의 역사가 약 1,700년으로 쪼그라들었습니다.



26대 성왕은 도읍을 사비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백제에서 남부여로 바꾸었는데, 백제의 뿌리가 북부여이기 때문에 국호를 바꿈으로써 북부여를 계승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일본의 고대 역사학자인 고바야시 야스코 교수는 백제의 제26대 성왕이 신라군과 싸우다 잡혀 죽었다고 알려졌지만, 변복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제29대 흠명왕이 됐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나라 홍윤기 교수도 고바야시 야스코 교수와 똑같은 백제의 성왕이 일본의 흠명왕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고, 흠명왕은 백제의 불상과 경전을 일본으로 보급한 인물입니다.



지난 2001년 일본의 아키히토 왕은 공식 기자회견장에서 "환무왕의 생모(화신립)가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라고 말했습니다. 

일본의 제50대 환무왕은 <속일본기續日本紀>를 편찬했는데, <속일본기> 내용 중에 "일본 기내(畿內) 지역 인구의 80~90%가 백지엔"이라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흔히 역사는 승자의 역사 기록이라는 말처럼 백제의 31대 왕으로 마지막 왕이 된 의자왕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용어가 '삼천궁녀'입니다.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과 '삼천궁녀'는 무능하고 방탕한 왕으로 만들기 좋은 연관어가 되어 있습니다. 



당시의 역사와 전혀 관련이 없는 상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과 '삼천궁녀'는 하나의 스토리가 되어 의자왕은 무능한 군주, 방탕한 군주, 패망 군주의 대명사가 되어 있습니다. 패망 원인이 의자왕 때문이라고 우리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지만,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은 제30대 장왕이 세상을 떠난 후 아버지의 뒤를 이어 31대 왕이 되었습니다.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은 어려서부터 효심이 지극했고 형제간에 우애가 깊어 사람들이 공자의 제자인 증자에 빗대어 '해동증자'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서력 642년 백제 의자왕 2년에는 몸소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40여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백제가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군에 의해 패망하기 불과 5년 전 고구려와 말갈과 함께 신라의 30여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멸망할 때 수도 사비성의 인구는 약 5만 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이 '삼천궁녀'를 데리고 놀았다는 기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없습니다. 어떤 역사서에도 '삼천궁녀'라는 용어도 없을뿐더러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과 '삼천궁녀'에 관한 기록은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습니다.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과 '삼천궁녀'라는 이야기가 처음 나온 것은 조선 시대 김흔(1448~1492)이 지은 '낙화암'이란 시에서 '삼천의 가무 모래에 몸을 맡겨 꽃 지고 옥 부서지듯 물 따라 가버렸다'는 것에 나오고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신용개(1463~1519), 김전(1458~1523), 남곤(1471~1527) 등이 중심이 되어 만든 시문집 <속동문선> 제5권에 '삼천궁녀 모래에 몸을 맡겨'라고 나올 뿐입니다.

















<광주 환단고기 북콘서트> - 3부 백제(百濟), 우주 광명문화를 꽃 피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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