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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한민족9천년 역사)

대중상과 대조영이 건국한 해동성국 대진국 발해

by 도생(道生) 2021. 2. 27.

남쪽 신라와 함께 남북국시대를 연 고구려를 계승한 대제국

대중상과 대조영이 건국한 후고구려 해동성국 대진국(발해)

 

 

 

 

 

 

 

 

 

 

 

10여 년 전 중국은 현재의 중국 본토까지 차지했고 동북아를 호령한 대제국(大帝國)을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고 중국의 역사로 편입했습니다. 중국은 소위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국가적 차원에서 추진하여 한韓민족의 역사를 일개 소수민족 말갈족이 세운 지방정권으로 격하시켰습니다.

 

 

한국의 강단사학은 당나라와 일본(왜)과 신라까지 사신을 보내고 조공을 바친 황제의 나라 대진국(발해) 역사를 거의 거론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강단사학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이 많지 않다는 이유로 대중상과 대조영이 고구려를 계승하여 건국한 해동성국이라 불린 대진국의 역사를 말할 때 대부분 중국의 문헌을 인용합니다.

 

 

그런 이유로 중국이 동북공정으로 해동성국 대진국(발해)을 당나라의 지방정권으로 편입할 때 방관하고 미온적으로 대처했습니다.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우리의 역사가 중국으로 편입되는 것을 보고도 역사학자로서 일말의 양심도 없는 구차한 태도를 보인 것입니다.

 

 

 

 

 

 

 

 

해모수 단군이 건국한 북부여를 계승한 대제국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후 고구려의 유장(遺將) 대중상과 아들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을 규합하여 서력기원 668년 '고구려를 회복하여 부흥한다'라는 뜻으로 나라 이름을 '후고구려'라고 했습니다. 대진국이라는 국호는 대중상 사후(死後) 대조영이 고구려의 옛 영토 상당 부분 회복한 뒤 서력기원 699년 선포한 국호입니다.

 

 

중국 <신당서>에는 서력기원 713년 당나라 현종이 낭장(郎將) 최흔을 보내 '대조영을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 홀한주도독에 책봉'했다고 '발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합니다. 중국의 <신당서>는 황제의 나라 대진국을 제후국으로 격하시키고 광명의 나라를 뜻하는 대진국을 '발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대중화(大中華) 관점에서 쓰인 중국의 <신당서>에 대진국을 '발해'라고 하여 일개 제후국으로 만들었지만, 대진국이 나당연합군을 물리치고 전성기를 구가하자 당나라가 대진국(발해)을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대중상과 대조영이 건국한 해동성국 대진국(발해)에 관한 내용은 중국의 문헌에만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일본의 정사(正史) <속일본기>는 대진 무황제(3대 황제)가 일본에 보낸 국서에 "고구려 땅을 차지하고 부여 전통을 계승한 나라"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발해는 옛 고구려국"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민족의 국통맥(나라 계보)과 정신문화를 기록한 <환단고기>의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 대중상과 대조영이 건국한 해동성국 대진국(발해)에 관한 기록이 자세히 나옵니다. 일제 식민사학을 신봉하는 한국 강단사학은 <환단고기> 내용이 사실로 증명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식민사학과 다르다는 이유로 위서(僞書)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대중상과 대조영이 건국한 후고구려에서 바뀐 국호 대진(大震)은 '동방 광명의 큰 나라', '동방의 나라'라는 의미입니다. 2009년 대진국(발해)의 옛 궁궐터가 발견됐습니다. 중국 <신당서>에 제후국 '발해의 왕'이 거주한 상경성의 제2 궁전지는 전면이 19칸에 달합니다. 반면 황제가 거주한 중국 장안성의 최대 건물인 함원전은 불과 11칸입니다.

 

 

중국 역사에는 일개 소수정권 제후국 왕이 중국 황제가 사는 궁궐보다 더 큰 궁궐에 살았다는 기록도 없고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다. <환단고기>는 대중상과 대조영이 건국한 해동성국 대진국(발해)이 황제의 나라였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증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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