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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한민족9천년 역사)

일제 강점기의 무단통치와 문화통치와 민족문화말살통치체제 정책

by 도생(道生) 2021. 3. 6.

한국의 역사와 정신문화를 말살한 일본 제국주의의 조직적이고 계획적이며 치밀한 전략

일제강점기의 식민 정책, 무단통치 체제와 문화통치 체제와 민족문화말살통치 체제 

 

 

 

 

 

 

 

 

17세기~19세기 도쿠가와 에도 막부시대 자국의 역사를 조작한 국수주의자들인 소위 '미도학파'에 의해 일본 왕을 신격화하는 '황국사관'이 시작되었습니다. 1868년 명치유신(메이지유신) 쿠데타로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지고 일본 왕 중심의 왕정복고가 이루어졌습니다.

 

 

명치유신의 주역을 길러낸 사람은 요시다 쇼인입니다. 요시다 쇼인은 조선을 정벌하고 동양을 집어삼키자는 소위 '정한론'과 '대동아공영론'을 주장한 자입니다. 이때부터 세상을 일본 왕이 다스린다는 소위 '황국사관'이 현실화하면서 이른바 '일선동조론', '만선사관', 임나일본부설', 정체성론', '타율성론', '당파성론' 등 일제 식민사관이 세상에 쏟아져 나옵니다.

 

 

황국사관이란 일본 '천황'이 세상의 중심이고 세계만방이 '천황'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황국사관의 최종 목표는 일본이 전 세계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무력을 앞세워 우리나라의 국권을 찬탈한 것은 1910년이지만, 일제가 19세기부터 우리나라를 영구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역사학자와 군인 등을 동원한 물밑작업을 해왔습니다.

 

 

1192년 가마쿠라 막부 이후 약 700년 동안 일본 왕은 사무라이 정권의 허수아비였습니다. 19세기까지 약 700년 동안 여러 무사정권 교체와 전국시대 등 많은 쿠데타와 내전, 폭동 등을 경험했습니다. 하급무사들의 반란인 1868년 명치유신도 쿠데타였기 때문에 일본이 우리나라를 영구 식민지로 만든 이후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반란의 싹을 잘라내는데 총력을 다한 것입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일차적인 목표는 조선의 영구식민지로 만든 후 대동아공영권 건설이지만, 최종 목적은 전 세계의 황국화입니다. 일제는 황국사관의 근본인 '팔굉일우' 이념을 내세워 세계 정복을 위한 일제의 침략 전쟁을 합리화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일제가 전 세계를 일본 '천황'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만들기 위한 첫 번째 목표가 됐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일본 제국주의처럼 치밀한 계획에 따라 영토뿐만 아니라 사람의 정신까지 식민지로 만든 나라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일제가 식민지를 만든 나라 중에 조직적이고 계획적이며 치밀하게 식민지로 만든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합니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제점령했던 시기를 무단통치 체제 시대와 문화통치 체제 시대와 민족문화말살통치 체제 시대로 구분합니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식민지배한 1910년대, 1920년대, 1930년에서 1940년대 중반까지를 외형적인 식민 정책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일제는 강점 이전부터 패망하던 1945년까지 하나의 정책만 유지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19세기부터 조직적이고 계획적이며 치밀하게 한국의 역사와 정신문화를 왜곡 조작 말살하는 데 총력을 다합니다.

 

일본이 무력을 앞세워 우리나라 영토를 정복할 수 있지만, 한국인의 정신은 제압할 수 없기 때문에 한국의 역사와 정신문화를 왜곡하고 조작 말살합니다. 일본과 조선의 뿌리는 같다는 '일선동조론', 한국의 남부를 고대에 일본이 다스렸다는 '임나일본부설' 등 일제는 19세기부터 식민사관의 토대를 마련하여 한국인을 일본의 노예로 만드는데 일관된 정책을 펴온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1910년대 '무단통치체제' 중에도 계속된

'문화통치'와 '민족정신문화말살' 정책

 

일면 맞고 일면 틀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겉모습이 바뀌었다고 속마음까지 다 바뀐 것이 아니듯 속마음과 겉모습이 모두 바뀌어야 진짜 모두 바뀐 것입니다. 무단통치체제, 문화통치체제, 민족문화말살통치체제는 일제강점기 일제가 시행한 식민정책을 표면적인 면만 보고 말한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일제가 패망하던 순간까지 일관된 정책은 오직 하나 한국인의 역사와 정신문화를 왜곡 조작 말살하여 영원히 식민지 노예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일제는 19세기부터 우리나라를 영구 식민지배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과 방법을 써왔지만, 오직 한길만 걸어왔습니다.

 

역사학자들이 흔히 1910년대를 일제가 우리 민족을 가혹하게 탄압한 무단통치체제 시대라고 합니다. 그러나 일제 감점기의 무단통치체제 훨씬 이전이었던 1894년 30만 명이 희생된 동학농민혁명, 우리나라 영토에서 (청일)전쟁을 벌이고, 1895년 대놓고 조선의 국모(國母)를 시해한 사건, 무고한 백성과 의병을 학살하는 등 1945년 광복을 맞을 때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한국인이 일제의 총칼 아래 무참하게 희생됐습니다.

 

 

1906년은 우리나라가 일제에 강제병합하기 전임에도 일제는 <통감부령> 제45호를 '포교규칙'을 제정 공포하면서 문화에 대한 통제를 시작합니다.

 

 

 

 

 

 

1910년부터 1911년까지 51종 약 20만 권의 사서를 강탈하고 불태웁니다.

1910년대 일제가 대대적으로 시행한 토지조사 사업과 회사설립을 통제한 회사령 등은 식민통치를 위한 자료 및 재정확보와 통제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1911년 대한제국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10만 권의 장서를 몰수합니다. 

1911년 1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하면서 일제는 교육을 통제하고 우리의 문화를 말살하기 시작합니다.

(1922년 2차 조선교육령, 1938년 3차 조선교육령 공포)

 

1915년 8월 '본령에서 종교라 함은 (일본)신도, 불교, 기독교를 말한다.'라는 소위 '포교규칙'을 공포합니다. 다시 말해 일제가 식민통치에 방해가 되지 않는 기독교와 불교 등의 외래 종교만을 인정하고 조선총독부 학무국 종교과에서 관리합니다.

1916년부터 본격적으로 우리의 유적과 유물을 파괴하고 수탈한 고적조사가 시작됐습니다.

(1902년 처음 한국을 방문하여 62일간 조사를 마친 세키노 다다시가 104년 '조선건축조사보고'를 바탕으로 1906년, 1909년 일제 식민사관을 입증하기 위한 '조선고적조사사업'이 시작)

 

 

국권이 찬탈 된 1910년 이후 일제 강점 초기였던 1910년대에 국한해서 일제가 무단통치체제로 정책을 시행한 것이 아닙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비록 1개 대대 규모의 병력이었지만, 일제가 패망한 1945년까지 단 하루도 무력을 사용하지 않은 날 없이 무단통치 정책을 일관되게 시행됐습니다.  

 

 

 

 

 

 

일제강점기 1920년대 '문화통치체제' 중에도 계속된

'무단통치'와 '민족정신문화말살' 정책

 

소위 '문화통치체제 정책'이란 1919년 3.1만세 운동으로 거센 저항에 부딪히자 유화 조치로 무단통치체제에서 문화통치체제로 전환했다는 것입니다. 헌병을 보통 경찰로 바꾸고 신문과 잡지 등의 발행을 허가하면서 1920년대 일제가 문화통치 정책을 시행했다고 하지만, 일제에 충성하는 부류로 친일을 하게 만들고, 제도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1904년 일본헌병대가 치안을 장악, 일제가 1905년 대한제국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 때부터 실질적으로 식민지배를 시작했습니다. 1907년 군대해산 등으로 국가의 기능이 작동하지 못했던 당시에도 독립신문, 대한매일신보와 같은 신문과 소년, 대한자강월보, 자선부인회 등의 잡지 발행을 묵인하고 있었습니다.

 

 

1920년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독립군이 일본군을 격파하며 대대적인 승리를 거둡니다. 

1920년 일본군이 간도 일대에서 한국인을 무참하게 학살한 간도 참변(경신참변)이 일어납니다.

1926년 일제의 폭압에 항거하는 6.10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무자비하게 탄압합니다.

1926년 소위 '문화통치체제' 정책이 시행되고 있었지만, 사회개혁을 다룬 <개벽>지는 창간된 지 불과 6년 만에 강제로 폐간됩니다.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가혹하게 탄압을 합니다.

 

소위 '문화통치체제의 정책'이 시행되던 1920년대 일제의 국내 한국인 탄압은 물론이고, 서간도와 북간도, 연해주 등지에서 얼마나 많은 한국인이 일제에 의해 희생됐는지 모릅니다. 일제의 총칼은 쉬지 않고 우리 민족을 가혹하게 탄압했고, 한국인을 학살하는 만행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일제강점기 1930년 '민족문화말살통치체제'에서 계속된 

'무단통치'와 '문화통치' 정책

1930년대는 세계적인 격동기였습니다. 1929년 세계 대공황이 일어난 후 일제가 1931년 만주침략과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침략전쟁을 확대하면서 엄청난 군수물자와 인력을 수급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고 우리나라는 일제의 병참기지가 되었습니다.

 

물적 수탈을 시작으로 강제노역과 강제징집, 그리고 어린 소녀와 여성들이 일본군대의 성노예로 끌려가는 등 일제의 잔혹한 만행과 수탈이 공개적으로 자행되던 때가 1930년대입니다. 일제가 우리나라(조선과 대한제국)를 침략하기 전부터 철저하게 준비한 것들이 완료되어 영구 식민정책과 대동아공영권, 세계 정복이라는 목표를 드디어 실행하게 된 것입니다. 

 

 

1936년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소위 '유사종교 해산령'을 발동하여 외래종교만 남기고 완전히 뿌리 뽑아 버립니다.

오래전부터 상해임시정부에 막대한 독립자금을 지원한 약 700만 명의 보천교가 하루아침에 문을 닫게 됩니다.

 

1940년부터 시행된 일제의 창씨개명 정책은 이미 몸과 혼인 국권을 찬탈하고 역사와 정신문화를 모두 왜곡 날조 말살한 이후였기 때문에 일제의 노예로 만들기 위한 마지막 작업이었습니다.

1940년 일제가 임시방편적인 정책으로 허가해줬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 폐간 사건은 일제강점기 일제의 일관된 정책으로 볼 때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1940년 고노에 후미마로 일본 총리가 시정방침 연설 당시 공개석상에서 '황국의 국시는 '팔굉일우(八紘一宇)' 정신에 근거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일본서기>에 신무천황이 '천하를 하나의 집안으로 만들겠다'라고 했다는 '팔굉일우'를 근거로 일제는 19세기부터 전 세계를 황국화 한다는 침략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가장 먼저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고, 중국과 동양을 넘어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과 일전을 벌이는 등 지속해서 전쟁을 벌인 목적은 하나입니다.

 

일제는 일본 '천황'이 천하의 중심이고, 천하를 통일하여 다스린다는 황국사관을 바탕으로 '전 세계를 하나의 집'으로 만든다는 목표뿐이었습니다. 일제의 만행에 가장 큰 피해를 봤습니다. 대한민국은 해방된 지 80년이 다 돼가지만, 아직도 일제 식민사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일제 식민사학을 우리 역사로 잘못 알고 배우고 있는 불쌍한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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