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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도, 진리眞理

정읍 대흥리 보천교와 이승만 대통령과 백범 김구 주석

by 도생(道生) 2021. 6. 3.

가을우주의 새 진리 무극대도(無極大道)의 첫 씨를 뿌리신 태모 고수부님

일제 조선총독부의 공식기록으로 항일 무장투쟁 자금을 지원한 600만 명

증산도 기본 진리(眞理)

2-10-③. 정읍 대흥리 보천교와 임시정부 초대 이승만 대통령과 마지막 백범 김구 주석

 

 

 

 

 

 

 

일본 제국주의는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실질적으로 대한제국을 식민통치하기 시작했습니다. 1945년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할 때까지 실질적으로 일제의 식민지배를 받은 기간은 40년입니다. 일제 식민지 치하가 끝나자마자 3년 동안 미군의 군사통치가 시작되었습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당시는 대통령제였습니다. 임시정부의 지도체제는 이후 국무령, 국무위원을 거쳐 주석제로 바뀌었습니다. 임시정부의 초대 이승만 대통령과 마지막 주석은 백범 김구 선생은 다른 곳에서 다른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해방 후 라이벌 관계가 된 한국 근현대사의 두 거인 이승만 대통령과 백범 김구 주석은 다른 정치철학을 가지고 있었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바로 현재 전라북도 정읍 대흥리의 보천교입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면서 해방을 맞았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 백범 김구 주석은 곧바로 귀국할 수 없었습니다. 미군정이 임시정부 주석이 아닌 개인자격으로 귀국한다는 서약서를 제출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1945년 11월 2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 선생은 서약서를 제출한 후 개인자격으로 김포공항에 도착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귀국했습니다.

 

 

 

 

 

 

개인자격으로 귀국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백범 김구 주석은 김포공항 도착 직후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을 하면서 정읍 대흥리 보천교에 빚을 많이 졌다."라고 말했고, 이후 정읍을 방문하여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6년 당시만 해도 한적한 시골이었던 정읍에 내려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한 이른바 '정읍 발언'을 공식적으로 밝힙니다.

 

 

이승만 대통령과 백범 김구 주석은 이념을 떠나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인정하는 근현대사의 두 거인입니다. 임시정부 백범 김구 주석이 귀국 하자마자 '정읍에 빚을 졌다'라고 언급하고, 정읍을 직접 방문했을 때도 같은 말을 했고, 이승만 대통령이 굳이 '정읍'에 와서 중대한 내용을 발표한 것은 정읍 대흥리 보천교가 항일 무장투쟁을 할 수 있도록 오랫동안 천문학적인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한 단체였기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 간악한 일제에 맞서 무장 항일투쟁을 하기 위해서는 독립운동자금이 필요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전과 임시정부 수립 이후에 이름 모를 민초들을 비롯하여 이석영과 이회영 형제들, 이상룡 선생 일가, 경주 최부자 가문, 유일한 박사를 비롯한 상인과 기업인, 미국과 멕시코 등 해외동포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동포들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부자라도 집과 전답 등을 팔아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면 다시 돈을 마련하기란 어렵습니다. 일부 상인과 기업에서 조선총독부 모르게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지만, 매출이라는 것이 한계가 있기 때문에 거금을 지속적으로 보낸다는 것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증산 상제님을 신앙한 정읍 대흥리 보천교는 6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여 임시정부에 지속해서 지원했습니다.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남쪽에는 믿을 사람이 너밖에 없다며 '남신(南信)'이라는 이름을 하사한 대부호 백남신 성도님도 정읍 대흥리 보천교에서 상제님을 신앙한 분입니다.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운동가와 임시정부 등에 독립자금을 지원하고 있다는 것을 조선총독부가 알고 있었지만, 증거를 잡기가 쉽지 않았고 600만 명이 넘는 신도가 있는 정읍 대흥리 보천교를 쉽게 건드릴 수 없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유사종교 해산령'을 공포하여 '합법'을 내세워 정읍 대흥리 보천교를 '유사종교'라는 굴레를 씌워 강제해산시킵니다.

 

 

정읍 대흥리 보천교는 1936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해산되기 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 백야 김좌진 장군, 도산 안창호, 박자혜 여사(단재 신채호 선생 부인) 등에게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국민 중 정읍 대흥리 보천교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해방 후 한국의 친일파 식민사학자들은 일제 조선총독부가 만든 가짜한국사는 정통 한국사로 둔갑시켜 정체성 없는 한국인으로 만들었습니다. 대한민국 학교에서는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가의 역사관을 가르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읍 대흥리 보천교에 대한 역사도 역사학자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밝히지 않은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일보의 항일운동 기사를 검색하면 정읍 대흥리 보천교가 가장 많이 등장합니다. 조선일보에서 검색된 기사는 밝혀진 것만 나온 것입니다. 항일운동과 독립운동자금 지원 사실을 신문사에 밝히고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없듯이 항일운동과 독립자금을 지원하다 조선총독부에 걸린 사건만 기사화된 것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정읍 대흥리 보천교를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역사를 집필하는 자들이 의도적으로 숨기고 있고, 국민은 아예 배우지 않아 알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임시정부 백범 김구 주석의 "정읍에 빚을 많이 졌다."라는 말과 '정읍 발언'을 한 이승만 대통령만 정읍 대흥리 보천교를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600만 명의 보천교 신도 중에는 임시정부와 의열단 등 항일운동에 직접 참여한 분도 있습니다.

 

 

 

 

 

<STB 스페셜 대한독립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 1, 2, 3>

https://www.youtube.com/watch?v=hKQ_bWNkaps 

https://www.youtube.com/watch?v=Za4dU_V9O9Y 

https://www.youtube.com/watch?v=qaKjREocn_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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