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사, 부여사, 고구려사, 발해사 등 한국고대사 연구의 권위자
일제 경성제국대학의 후신 서울대 국사학과 출신 노태돈 명예교수
1971년 대한민국 정부는 과학기술을 통한 경제발전을 이루기 위해 카이스트(KAIST, 한국과학기술원)를 설립하여 인재를 육성했습니다. 정부가 주도하여 대학을 설립한 예는 대일항쟁기에도 있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나라를 강제 병합하고 원활한 식민지배를 위해 일제의 말을 잘 듣는 한국인 엘리트 노예를 양성할 제국대학을 만든 것입니다.
명치유신 이후 일제의 제국대학은 1886년 설립된 동경제국대학을 시작으로 일본에 7곳, 식민지였던 우리나라(1924년)와 대만(1928년)에 각 1곳씩 총 9개가 설립됐습니다. 식민통치의 사령부인 조선총독부는 조선사편수회와 경성제국대학 사학과에서 우리 역사를 왜곡 날조해 엉터리 식민사학 이론을 만들었습니다.
경성제국대학 사학과와 함께 한국사 말살의 심장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를 주도한 인물들은 대부분 일제 관변사학자들이었고, 조선사편수회의 고문과 위원, 간사, 서기, 촉탁, 수사관(보) 등에는 이완용, 박영효, 이병도, 신석호 등의 한국인도 있었습니다. 한국고대사 연구의 권위자라는 서울대 국사학과 노태돈 명예교수는 일제 식민사학의 거두인 이병도의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그대로 이식받은 식민사학의 후예입니다.
일제의 충직한 노예를 양육하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1924년 설립한 경성제국대학은 서울대학교의 전신입니다. 경성제국대학 사학과 출신의 신석호는 조선사편수회에서 한국사 날조에 앞장섰고, 해방 후 조선사편수회의 모든 기록을 가지고 소위 '국사관'(국사편찬위원회)을 설립했습니다. 다시 말해 해방 후부터 우리가 '한국사'라고 배우는 소위 '국사國史'는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가 '한국사'로 날조한 일본사입니다.
혹자는 '오래전 일제 식민사학을 극복했다.', '지나친 왜곡이다.', '사이비역사학의 일방적인 공격이다.' 등 너무 억울하다고 강변하겠지만, 해방 후부터 현재까지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껍데기만 바꾸고 알맹이는 그대로 유지한 채 주입한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야말로 진정한 사이비역사학, 유사역사학, 매국사학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故 김용섭 교수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출신으로 서울대학교 문리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故 김용섭 교수의 회고록인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에는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장악한 일제 식민사학 후예들과 식민사학 청산 문제로 갈등을 겪었고, 급기야 식민사학 후예들에게 왕따를 당한 후 서울대를 떠난 일화가 잘 나와 있습니다.
일본 와세다대학 사학과 출신으로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한국사 왜곡 말살 작업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이병도는 해방 후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되어 일제 식민사학을 그대로 이식합니다. 서울대학교 사학과는 1969년 동양, 서양, 국사의 3개 학과로 분리됐습니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사학과)가 배출한 이기백, 이기동, 김철준 등과 한국고대사 연구의 권위자라는 노태돈 명예교수도 모두 이병도의 식민사학을 전수받은 후학입니다.
한국고대사 연구 권위자라는 노태돈 명예교수는 1971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했으며 1975년 대학원에서 '삼국시대 부(部)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계명대 사학과 조교수를 거쳐 1981년 7월부터 2014년 8월까지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노태돈은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한 지 약 30년이 지난 1999년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해방 후 서울대학교 사학과를 접수한 이병도를 필두로 이기백, 김철준과 같은 대학 사학과 출신으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한 천관우, 그리고 한국고대사 연구의 권위자라는 노태돈 명예교수의 소위 '부체제(部體制)설'은 고대 국가 가야는 물론이거니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초기 역사는 중앙집권체제가 아니라 각 부족의 연립, 연맹체제라는 주장은 일제 식민사학의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과 '임나일본부설'과 같은 주장입니다.
소위 '부체제설'은 일제 식민사학이 조작한 소위 '임나일본부설'을 정당화하기 위해 주장한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과 같습니다.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가 한국사를 난도질해 만든 엉터리 일제 식민사학을 유일한 진리로 신봉하는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비롯한 한국 주류 강단사학은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무조건 부정합니다.
서강대 사학과 출신으로 서강대 사학과 교수와 총장을 역임한 이종욱 서강대 석좌교수는 한국 주류 강단사학은 일제 식민사학을 반복하고 있는 後식민사학이라고 비판합니다. 특히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해방 후 이병도는 서울대 사학과, 신석호는 고려대 사학과, 이병도의 제자인 이기백과 이기동은 서강대와 동국대 사학과를 장악했지만, 한국 역사학의 심장부는 일제가 충직한 노예를 양성하기 위해 만든 경성제국대학의 후신인 서울대 국사학과입니다.
한국고대사학회 회장과 한국사연구회 회장 등을 지낸 한국고대사 연구의 권위자라는 노태돈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명예교수는 한겨레신문과 인터뷰에서 "60년대만 해도 민족이 이른 상고 시기에 생겨 운명공동체로 이어졌다고 봤다. 하지만 이는 성립이 안 되는 말이다. 여러 집단이 융합해 큰 집단을 이루면서 민족의식이 형성됐다고 봐야 한다. '한 핏줄 한겨레 단군의 자손'이라는 말도 불과 20세기 초에 나왔다. 1906~7년 의병전쟁 때 '4천년 역사, 3천리 강토, 2천만 동포'란 말을 처음 썼다. 일종의 선동 구호였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노태돈의 주장이 맞는 부분도 있습니다. '3천리 강토'는 역사 지식이 없는 일반 백성들이 알던 영토 범위였고, 후일 쓰다 소키치와 이케우치 히로시 등 일제 식민사학자가 고려와 조선의 국경선을 조작해 한반도로 축소했기 때문에 맞는 말입니다. '2천만 동포'는 당시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대략적인 우리나라의 인구수였기 때문에 이 말도 맞습니다. 나머지 노태돈이 주장은 경성제국대학 사학과 교수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식민사학자 주장과 똑같습니다.
노태돈의 발언은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 한국의 문헌을 모두 부정하는 망발입니다. 한국인인 노태돈은 한국 사료를 부정하고 일제 조선총독부 역사관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대일항쟁기 일제 식민사학자들도 단군왕검의 고조선과 한민족의 4천년 역사를 말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조선총독부가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인 배달과 환웅 등 용어가 들어간 출판물은 내용을 삭제하든지, 아니면 출판 자체를 불허했고, 역사 교육 시 단군조선을 제거하라는 국사교육지침까지 내릴 정도였다는 사실입니다. 노태돈의 여러 주장은 아직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교육되고 있습니다. 소위 한국고대사 연구의 권위자라는 자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환단고기 북콘서트 강화도편: 16, 17, 18회 환단고기가 밝히는 단군조선>
https://www.youtube.com/watch?v=4gyRISzyLz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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