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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한민족9천년 역사)

'임나는 가야다' 일본서기에 없는 내용을 주장하는 한국 역사학계

by 도생(道生) 2021. 11. 14.

'임나는 가야다'라는 내용이 없지만, 끝까지 있다고 주장하는 일제 식민사학의 후예들

역사 사실과 연대가 불일치한 '일본서기'의 사료적 가치를 높게 평가한 한국 역사학계

 

 

 

 

 

 

 

최근 일어난 사건과 관련되어 발간된 서적이라면 굳이 학계에서 검증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팩트체크가 가능합니다. 반면 수백 수천 년 전 편찬된 문헌이라면 담긴 내용을 무조건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나라에서 편찬된 다른 문헌 및 주변국에서 동시대 역사를 기록한 문헌 등과 교차 검증을 통해 기록의 정확성을 확인해야 합니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잔머리를 굴려 자국의 역사는 미화하고 다른 나라의 역사는 깎아내린 왜곡된 중국 문헌을 이용하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한국 고대사는 믿을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는 한국의 상고 역사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를 왜곡 날조한 '조선사 35권'을 편찬했습니다.

 

 

특히 역사적 사실과도 부합하지 않고 여러 사건이 발생한 연대까지도 틀린 '일본서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국 고대사 조작했습니다. 나카 미치요, 쓰다 소키치 등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건국 연대가 '일본서기' 기록과 맞지 않다는 이유로 <삼국사기>의 기록은 믿을 수 없다는 소위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주장했습니다.

 

 

 

 

 

 

대표적인 일제 식민사학자 시라토니 구라키치는 '<삼국유사>는 요괴스럽고 황탄하다.', 즉 '말이나 하는 짓이 믿을 수 없는 요사스럽고 괴이한 책'이라는 망발을 내뱉었습니다. 일제 식민사학을 추종하는 한국 역사학계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내용이 '일본서기'의 역사적 사건과 연대가 전혀 맞지 않는다는 내용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일본서기'에 '임나는 가야다'라는 내용이 없지만, '임나는 가야다'라고 주장하며 '일본서기'의 사료적 가치를 높게 평가합니다. 일례로 서기 42년 건국된 가야는 기나긴 520년의 역사를 끝마치고 서기 562년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했습니다. 우리의 정통사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세계사에도 드문 화려하고 찬란했던 500여 년의 역사와 문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가야의 역사를 부정합니다.

 

 

한국 역사학계는 김수로왕의 가야 건국 사실을 누구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삼국사기> 기록으로 고구려는 사기전 37년, 백제는 서기전 18년, 신라는 서기전 57년 건국됐습니다. 그러나 한국 역사학계는 고구려는 6대 태조왕, 백제는 8대 고이왕, 신라는 17대 내물왕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고대국가의 기틀을 다졌다라고 주장하며 <삼국사기>를 부정하는 식민사학의 허무맹랑한 주장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습니다.

 

 

 

 

 

 

일제 식민사학은 고대 야마토 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소위 '임나일본부설'을 정설로 만들기 위해 한국 고대사를 부정한 것입니다. 한국 역사학계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지명을 가지고 가야고분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일본서기'는 서기 720년에 완성된 책입니다. “삼한(三韓)이 일본의 모국이요 동족이다.”라는 내용을 본 일본 제50대 간무 천황(737~806)이 '일본서기'를 불태웠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한일동족 관계와 관련된 모든 사료를 분서(焚書, 불태워버림)한 간무 천황의 일화는 9세기 초엽 편찬된 <일본서기>의 강독 기록인 <홍인사기弘仁私記>에 “옛날 일본은 삼한과 동종이라고 전해 왔음, 그 책들은 간무 천황 때 불태워버렸다.”라고 나오고, 14세기 일본 정치와 사상적 지도자인 기타바타케 치카후사(1293~1534)가 편찬한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에도 나옵니다.

 

 

'일본서기'를 한국과 일본의 고대사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고 높게 평가하는 한국 역사학계는 이런 내용을 절대 말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의 정통 사서(史書)인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서력 42년 김수로왕 가야 건국 내용이 나오고,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도 서력 42년 가야 건국 기록이 나오지만, 절대 인정하지 않습니다.

 

 

 

 

 

 

'일본서기'를 높게 평가하는 한국 역사학계가 주장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일본서기'에 나오는 몇 가지 역사기록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지명으로 가야고분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추진하는 한국 역사학계는 '일본서기'를 읽지도 않았고, 설혹 봤다 치더라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거의 문맹 수준이라는 사실을 아래 몇 가지 내용을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서기'에는 '임나는 가야다'라는 내용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 역사학계와 일본 극우세력은 '일본서기'의 사료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여 ’임나는 가야다’라고 주장하고, '일본서기'에 나오는 지명으로 가야고분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밀어붙이면서 '임나는 가야다'라는 주장을 끝까지 굽히지 않고 있습니다. 

 

 

'일본서기' 내용을 한반도 고대사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고 하다 보니 어긋나는 것입니다. '일본서기' 자체가 내용이 너무 많이 왜곡 조작됐지만, 특히 지명 같은 경우에 '일본서기'가 일본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기 때문에 한반도 남부가 아닌 일본 열도에서 찾아야 하는데도 한국 역사학계가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추종하기 때문에 어처구니없는 상황만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일본서기>

- 숭신 65년(서기전 33년) - 가야가 없었고, 임나의 위치를 가장 정확하게 기록

"임나국에서 소나갈질지를 보내 조공했다. 임나는 축자국에서 2천여 리 떨어져 있고,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으며 계림(신라)의 서남쪽에 있다.

 

- 수인 천황 2년(서기전 28년) - 가야 건국은 서기 42년 

“이 해에 임나(任那)인 소나갈질지가 ”나라에 돌아가고 싶다.“라고 청하였다. 아마도 천황의 시대에 알현하러 와서 아직 돌아가지 않았던 것인가. 그래서 소나갈질지에게 융숭하게 상을 주었다....“

 

- 신공 9년(서기 209년) - 7세기 '일본'이라는 국호 처음 사용

고구려, 백제, 두 나라 임금은 신라가 지도와 호적을 거두어 일본국(日本國)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비밀히 명을 내려 그 군세를 살펴보니 곧 이길 수 없음을 알고 군영 밖에 와서 머리를 조아리며 ”지금부터 영원히 서쪽 울타리로 칭하면서 조공을 끊이지 않게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 신공 49년(서기 249년을 서기 369년이라고 우김) - 사실도 아니고 2주갑(周甲), 즉 120년을 끌어올림

“황전별과 녹아별을 장군으로 삼아 구저 등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가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남가라. 비자현, 녹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 등의 7개국을 평정하고....”

 

- 추고 8년(서기 600년) - 서기 562년 가야 멸망 후에도 계속 등장하는 임나

“신라와 임나가 서로 싸웠다. 천황이 임나를 구하려고 하였다.”

- 추고 18년(서기 610년)

“사신을 파견하여 신라와 임나의 사인(使人)을 불렀다.”

- 추고 31년(서기 623년)

“신라가 대사 마말 지세아를, 임나가 달솔나말 지를 파견하여 함께 내조했다.”

“이 해에 신라가 임나를 토벌하였다. 임나는 신라에 복종하였다.”

- 서명 10년(서기 638년)

“고구려, 백제, 신라, 임나가 함께 조공을 바쳤다.”

- 흠명기 원년(서기 640년

“고구려, 백제, 신라, 임나가 함께 사신을 보내 헌상하고 겸해서 조공을 바쳤다.”

- 효덕 대화 2년(서기 646년

’고구려, 백제, 임나, 신라가 나란히 사신을 보내 조부(調賦, 세금)를 바쳤다.‘

 

 

<환단고기 북콘서트 부경대편: 가야와 임나의 진실을 밝힌다>

https://www.youtube.com/watch?v=AOXK8TjtM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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