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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도, 진리眞理

보천교와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 청와대 명칭의 유래와 역사

by 도생 2022. 3. 22.

1939년 조선총독부 총독관저→1945년 미 군정 사령관 관사→1948년 경무대

상제님의 천지공사는 일점일획(一點一劃)도 어김없이 반드시 이루어진다.

증산도 근본 진리

6-18. 보천교 청기와와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 등 청와대 명칭의 유래와 역사

 

 

 

 

 

<1939년 남산에 있던 조선총독 관저가 옮겨간 자리 경복궁 후원>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의 집무실과 관사 및 비서진의 집무공간이 모여 있는 장소를 지난 60여 년 동안 '청색 기와집(靑瓦臺)'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고 있는데, 유래와 역사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10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1905년 7월 29일 미국과 일본은 각기 필리핀과 대한제국에 대한 침략과 식민 지배를 묵인한다는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합니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 제국주의가 실질적으로 대한제국을 식민지배하기 시작한 을사늑약은 고종황제가 직접 옥새(국새)를 찍기를 거부했습니다. 1905년 11월 17일 자로 만들어 놓은 문서 때문에 다급해진 일본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는 을사오적 등 매국노들을 데리고 11월 18일 새벽 강제로 체결한 문서에는 일본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대한제국 외부대신 박제순의 도장이 찍혔습니다.

 

 

1906년 2월 일제가 대한제국을 식민통치하기 위해 남산에 조선통감부와 통감관저가 지어졌습니다. 조선통감부와 통감관저는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와 총독관저로 명칭이 바뀌게 됩니다. 조선총독부는 1926년 경복궁을 허물고 새로운 청사를 지었고, 총독관저는 현재의 청와대 부지로 확정되고 1939년 완공되면서 조선총독부 7대 미나미 지로 총독이 입주합니다.

 

 

 

 

 

<정읍 보천교 십일전과 부속 건물의 청기와를 가져가 장식한 총독관저>

청와대는 국군통수권자이면서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의 집무실과 관저 및 관계자들의 사무실이 모여있는 곳으로 대한민국의 심장부입니다. 조선총독부는 당시 상해임시정부와 만주 독립군들에게 군자금을 보내주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약 700만 명이 상제님을 신앙한 보천교를 두려워했고 가혹하게 탄압했습니다.

 

 

일제가 총독관저를 지을 때 사용한 청기와는 조선총독부가 전라도 정읍 대흥리에 있던 보천교를 해산시키고 건물을 해체하고 가져온 것입니다. 보천교의 십일전은 경복궁 근정전보다 크고, 중국 북경의 황제궁보다 더 큰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궁전이었습니다. 십일전(十一殿)과 부속 건물의 지붕을 덮고 있던 황와(黃瓦)와 청와(靑瓦), 즉 보천교 건물 지붕을 장식한 기와(瓦)에서 청와대 명칭의 유래와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보천교 십일전과 부속 건물을 지을 때 최고의 전문 기와공이 만든 황금색 기와와 청기와로 건물 지붕을 장식했습니다. 황금색 기와와 청기와는 도자기처럼 구워만들기 때문에 전문기술이 필요했고 비용도 비싸서 일반 건물에 올리지 못합니다. 1936년 보천교를 강제로 해산시킨 후 십일전을 비롯한 부속 건물을 모두 부수고 민간에 팔아 버렸습니다. 황금색 기와는 황제가 거처하는 황궁에만 덮을 수 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일왕 때문에 청기와만 가져다 총독관저 지붕에 올립니다.

 

 

 

 

 

 

<1960년 12월 30일 경무대 명칭을 청와대로 바꾼 윤보선 대통령>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면서 광복을 맞았지만, 기쁨도 잠시 미군이 한반도 이남을 점령합니다. 미 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은 조선 총독관저를 자신의 관저로 사용합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미 군정 사령관의 관저에 입주합니다. 여러 설이 있지만, 경복궁의 '경(景)' 자와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의 '무(武)' 자를 따와 '경무대(景武臺)'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됐다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와 3.15의거가 도화선이 되어 장기집권을 꿈꾸던 세력은 4.19민주 혁명으로 축출됩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13년 장기집권이 막을 내리고, 1960년 허정 과도내각을 거쳐 대한민국 국회에서 내각책임제 개헌이 통과됩니다. 장면은 국무총리로 선출되고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은 윤보선이 선출됩니다. 

 

 

1960년 12월 30일 윤보선 대통령은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 및 비서진들의 집무공간이 모여 있는 경무대(景武臺) 명칭을 청와대로 바꿉니다. 청와대로 명칭을 바꾼 것은 경무대를 중심으로 13년 장기집권하는 동안 숱한 부정부패가 이루어져 부정적인 인식을 우려한 조치로 '청기와를 덮은 집'이라는 의미의 청와대로 명칭을 바꾼 후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의 청와대 명칭의 유래와 역사의 시작은 보천교 청기와>

경복궁 근정전도 처음 지어졌을 때 청기와를 덮었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의 '세종실록 61권, 세종 15년 7월 12일' 자에 등장합니다. "근정전 취두가 비로 인해서 무너졌으니 마땅히 고쳐 덮게 하여야겠는데, 청기와(靑瓦)를 구워 만들자면 그 비용이 매우 많으므로 아련와(牙鍊瓦)를 구워서 덮을까 한다."

 

현재 남아 있는 궁궐의 청기와 건물은 창덕궁 선정전이 유일합니다. 현재의 청와대 자리는 조선 최초의 궁궐이며 법궁이었던 경복궁의 후원이었습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집무실과 관저, 부속 건물 등이 있는 청와대는 지금도 청기와가 덮여 있습니다. 청와대라는 명칭은 보천교 십일전에서 유래된 것이며 현재 부지의 청와대 역사는 조선총독부의 총독관저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 당선자의 배우자도 청와대 영빈관 이전을 언급했을 정도로 청와대 부지는 풍수지리학적으로 흉지라는 말이 많습니다. 대통령 당선자와 인수위는 '구중궁궐', '제왕적 권력 상징', '국민과 소통' 등의 명분을 내세우며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를 다른 장소로 옮기고, '가능성 제로'라는 표현을 써가며 청와대에 절대 들어가지 않겠다고 단언했고, 최근 대통령 집무실을 용산 국방부 청사로 이전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왕조시대 임금은 절대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의 용안을 직접 본 일반 백성은 별로 없습니다. 눈앞에 임금이 있어도 감히 머리를 들고 쳐다보지도 못했습니다. 32년 재위 기간 내내 구중궁궐에서 지냈지만, 대한민국 국민 절대다수가 역대 군주 중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특집 병란(病亂) 개벽문화 북콘서트: 후천문화원전 도전道典 강해 2차

- 팬데믹 병란개벽과 다가오는 상생의 새시대>

https://www.youtube.com/watch?v=qQrAdym4fZ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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