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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도, 진리眞理

임시정부, 의열단, 김좌진 장군 독립운동과 군자금 지원의 심장부 보천교

by 도생 2022. 3. 17.

일제 조선총독부 공식 문서와 미국 조선총영사 밀러의 '조선보고서' 약 600만 명

일제 조선총독부가 '유사종교'와 '친일단체'라는 굴레를 씌워 탄압하고 해체한 단체

증산도 근본 진리

6-16. 약산 김원봉 단장의 의열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직접 참여하고

임시정부, 김좌진 장군 등 만주 독립단체에 군자금을 지원한 심장부 보천교

        

 

 

 

 

 

 

<대한민국 역사학자 중 단 한 명도 언급하지 않는 항일 독립운동의 성지 전라도 정읍>

1945년 8월 15일 잔악한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하면서 독립운동가와 중국, 일본 등 해외에 있던 동포들도 귀국하게 됩니다. 한반도를 접수한 미군정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을 개인 자격으로만 귀국할 수 있다고 못 박아버립니다. 다시 말해 미군정은 한반도에서 문제가 발생할 것을 우려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임정 주석인 백범 김구 선생은 어쩔 수 없이 1945년 11월 19일 미군정에 정부로서 행세하지 않고 미군정에 협조하고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다는 서약서를 미군정에 제출합니다. 1945년 11월 23일 비록 개인 자격이었지만, 꿈에도 그리던 조국의 품으로 돌아온 백범 김구 선생은 김포공항에 내린 직후 "정읍 보천교에 많은 빚을 졌다."라고 말햇습니다.

 

 

대일항쟁기(일제강점기) 상해 임시정부와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항일무장단체 의열단과 만주의 독립군 단체가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필요한 군자금은 독립운동을 지속하게 하는 생명줄, 즉 상해와 만주 등 항일 독립운동의 심장부에 공급하는 혈액과도 같습니다. 정읍 보천교는 독립군 육성과 독립운동에 필요한 군자금 지원의 심장부였지만, 한국 역사학자 중 단 한 명도 독립운동의 성지인 전라도 정읍 보천교를 말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열단, 김좌진 장군 등에게 군자금을 지원한 심장부였고 독립활동에 참여한 보천교>

전라도 정읍의 보천교는 1918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약소민족대회와 1919년 파리에서 열린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가한 김규식 선생과 여운형 선생에게 1만 원의 여비와 활동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합니다. 1919년은 일제의 탄압과 수탈에 맞서 전국적으로 일제에 항거한 삼일만세혁명과 현재 대한민국의 뿌리가 되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해입니다. 보천교는 1919년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 설립에 5만 원을 지원합니다.

 

 

1919년 김원봉의 주도로 항일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이 조직됩니다. 1923년 상해에서 한민족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됐을 때 보천교 간부 강일(강홍렬), 배홍길(배치문), 김종철이 참석했습니다. 보천교 청년단 대표 강일과 진정원 간부 배홍길은 국민대표회의가 끝난 후 의열단에 가입하고 김원봉 의열단 단장으로부터 군자금 모집의 밀명을 받고 국내에 들어왔습니다.

 

 

1919년 중국으로 넘어가 연경대학 의예과를 다니던 박자혜 여사는 1920년 독립운동가이며 역사가인 단재 신채호 선생과 결혼합니다. 신채호 선생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했고, 박자혜 여사는 1922년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귀국합니다. 1924년 정의부가 항일 무장독립투쟁에 필요한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비밀요원을 국내로 파견합니다. 이때 보천교 신도였던 박자혜 여사가 보천교 북방주인 한규숙을 소개하여 군자금을 지원하게 됩니다.

 

 

 

 

 

<임시정부 독립운동과 김좌진 장군 등 독립군 군자금 지원은 극비리에 진행되어 다 밝히지 못한다>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김원봉 단장을 비롯한 의열단 및 만주 무장독립군은 해외 동포로부터도 군자금을 지원받았지만, 대부분의 군자금은 국내에서 지원했습니다. 만약 군자금 지원 사실이 일제에 의해 밝혀지면 혹독한 고문과 옥고를 치르거나 심지어 목숨까지 잃기 때문에 독립운동에 필요한 군자금을 모집을 극비리에 추진했습니다.

 

 

때문에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김좌진 장군 등의 만주 독립군단체에 남은 기록과 일제에 의해 발각된 건을 제외하면 항일 무장독립운동에 참여하거나 군자금 지원한 사실을 밝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좌진 장군은 최측근 유정근을 통해 보천교 차경석 성도에게 서한을 보내 만주에서 함께 독립운동을 하자고 요청하고 당장 필요한 군자금 지원도 요청했습니다.

 

 

1924년 11월 26일 일제의 관동청경무국은 일본 외무성 아세아국과 조선경무국 등에 북로군정서 김좌진 총사령관이 독립전쟁에 필요한 군자금 2만 원(다른 기록은 5만 원)을 보천교 차경석 성도님으로부터 제공받았다고 보고합니다. 1924년 쌀 한가마니 가격이 오원 삼십전이었습니다. 정읍 보천교는 임시정부와 김좌진 장군 등에게 군자금을 지원하고 의열단에 들어가 무장독립운동에 직접 참여하는 등 대한독립운동의 심장부였습니다. 

 

 

 

 

 

<특집 병란(팬데믹) 개벽문화 북콘서트: 후천문화원전 「도전道典」 강해 1차

병란(病亂)개벽의 대세(大勢, 일이 진행되어 가는 형세)와 실상>

https://www.youtube.com/watch?v=MjtYSGYkpv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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