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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한민족9천년 역사)

일제의 앞잡이 노덕술을 뛰어넘는 현대판 친일파 유사역사학

by 도생(道生) 2022. 3. 27.

<환단고기> 위서론을 퍼트리기 위해 한암당 이유립 선생을 음해하는 무리

일제 앞잡이 노덕술을 뛰어넘는 현대판 친일파 반민족행위집단 유사역사학

 

 

 

 

 

 

<적반하장도 유분수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업무 방해와 해산으로 살아남은 반역자>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유분수'라는 말이 있습니다. '유분수(有分水)'란 '마땅히 지켜야 할 분수가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허무맹랑한 말을 듣거나 기가 막히고 너무 어이없는 상황에 맞닥칠 때와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 했을 때 '배은망덕도 유분수', '자화자찬도 유분수', '청천벽력도 유분수', '적반하장도 유분수'. '무식해도 유분수' 등의 말을 사용합니다.    

 

 

'적반하장(賊反荷杖)'이란 물건을 훔치러 남의 집에 들어온 도적놈이 몽둥이를 든다.', 또는 '잘못한 사람이 도리어 잘한 사람을 나무란다'라는 의미입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대일항쟁기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반민족행위를 한 친일파를 단죄하기 위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됐지만, 해방 후 기득권 세력이 된 친일파들과 이승만 정권이 손잡고 공권력을 동원한 방해 공작으로 끝내 반민특위가 해체됐습니다.

 

 

반민특위 발족으로 악질 친일파들의 종말을 기대했던 국민들은 기대는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대한민국 전체가 친일파 천국이 되어버렸습니다. 의열단 단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 선생이 북한으로 월북한 것은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한 악질 친일 경찰 출신의 노덕술에게 체포되어 무차별 구타를 당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합니다.

 

 

 

 

 

 

<악질 친일 경찰의 대명사가 된 노덕술보다 한술 더 뜨는 현대판 친일파 유사역사학 집단>

일본군과 일경을 비롯하여 정치, 경제, 사회 등의 분야에서 일제의 충직한 개가 된 악질 친일파들은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인에게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인식과 정체성을 심어주는 역사학자는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대일항쟁기(일제강점기)뿐만 아니라 해방 후에도 친일 유사역사학 바이러스를 유포한 역사 분야 친일파들은 승승장구해왔습니다.

 

 

현대판 친일파 유사역사학 집단의 악행은 악질 친일 경찰의 대명사가 된 노덕술과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호의호식한 일제의 앞잡이 노덕술은 죽음으로 그 악행이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매국의 조선총독부 역사학을 진리라고 생각하고 신봉하는 한국 주류 역사학계는 후학들에게 계승되었습니다. 개인의 영달을 위해 한국인의 정치성을 파괴하고 역사와 정신문화를 말살한 주류 강단사학은 권력에 빌붙어 기생한 일제의 앞잡이 노덕술의 반민족행위를 뛰어넘는 악질적 행위는 대적 불가와 비교 불가입니다.

 

 

친일파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근 80년 동안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카르텔을 형성하여 학문권력을 유지해온 친일파 유사역사학 집단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았습니다. 학문권력을 유지해온 친일파 유사역사학 무리가 나름 초강력 태풍이 와도 무너지지 않을 만큼 철옹성을 쌓았다고 생각할지 착각 속에 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종말은 머지않았습니다.

 

 

 

 

 

 

<환단고기를 세상에 내놓은 이유립 선생을 친일파로 매도하는 현대판 친일파 유사역사학 무리>

해방 후부터 근 80년 동안 친일 유사역사학을 유포하고 있는 식민사학 카르텔과 유사역사학에 기생하며 밥법이를 하는 식민사학 홍위병은 <환단고기>를 위서로 매도합니다. 더 나아가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환단고기>를 세상에 내놓은 한암당 이유립(1907~1986) 선생을 친일파로 매도합니다. 

 

 

이유립 선생은 대일항쟁기인 1919년 삼일만세혁명에 참가했고, 아버지 이관집 선생의 인도로 <환단고기> 편찬자인 운초 계연수 선생이 운영한 배달의숙에서 역사를 공부했으며 <조선독립소년단>에서 단장을 맡았습니다. 당시는 의지만 있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독립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이유립 선생은 천마산대에 입대해 소년통신원으로 활약했습니다.

 

 

1920년대 임시정부 직할 참의부 독립군부대에 활약한 223명의 명단이 발견됐는데 10대가 39명이었습니다. 친일 유사역사학의 홍위병 노릇을 하는 암세포와 같은 자들이 이유립 선생은 친일파라고 주장은 크게 4가지입니다. 첫째는 1931년 조선총독부 발행 월간지 '조선'에 투고한 시(詩)에서 '일제 하의 태평성대를 노래'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초등학생이 시(詩)를 봐도 그런 내용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일제 앞잡이 노덕술처럼 온갖 협잡질로 독립운동가를 가혹하게 탄압한 일본 왕의 충직한 노예와 다름없습니다. 

 

 

 

 

 

 

<스스로 종말을 앞당기고 있는 현대판 친일파 유사역사학의 황당한 주장>

일제 식민사학을 계승한 친일 유사역사학이 두 번째로 내세운 주장은 '친일 단체 조선유교회 가입'인데, 정작 입교 동기와 행적 및 친일 유사역사학이 주장한 친일 행위?가 무엇인지 말하지 못합니다. 대일항쟁기에 조선총독부는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단체는 무조건 해산시켰습니다. 이유립 선생은 <삼육회>와 <신간회>에서 민족운동 활동이 저지당하자 아버지 이관집 선생의 허락을 받고 '조선유교회강학소'로 입교하여 6개월간 경학, 윤리, 심리학, 유교철학, 문학사, 종교학 등을 배웁니다. 

 

 

이유립 선생을 친일파로 매도한 세 번째는 '친일 성향의 기관지 일월시보의 주필 역임'입니다. 무식한 건지 바보인지 모르겠지만, 이유립 선생이 일월시보 주필로서 쓴 글은 우리의 시원 역사와 문화에 대한 글입니다. 친일 유사역사학의 억지 주장은 일제가 식민지배한 시기에 한반도에 산 사람과 삼일독립만세혁명 등에 참여한 사람은 모두 친일파와 반역자라는 무지막지한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마지막 주장은 '친일 신문이 된 동아일보 삭주 지국장 역임'을 문제 삼았습니다. 1936년 동아일보의 손기정 선수 일장기말살사건으로 무기한 정간 조치를 받습니다. 1937년 정간 조치가 해제되고 독립운동가 백관수 선생이 동아일보 사장으로 취임합니다. 1938년 1월 21일 동아일보 삭주 지국이 개설되고 이유립 선생이 지국장으로 임명된 후 1938년 4월부터 동아일보가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동조하는 친일적 기사와 사설을 싣기 시작하자 4개월도 안된 5월 1일 지국장을 사임했습니다.

 

 

<STB 스페셜 103회: 환단고기가 위서가 아님을 입증하는 사료의 고찰,

이명우 운룡도서관장 - 1909년 환단고기 등사본 공개>

https://www.youtube.com/watch?v=pwIapjdhmj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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