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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도 도전道典

38선을 기준으로 한반도 이북은 소련 이남은 미국이 분할점령

by 도생(道生) 2022. 8. 9.

19세기, 20세기, 21세기 때론 적국으로 때론 우방국으로 우리나라와 밀접했던 두 나라

38선을 기준으로 한반도 이북(以北)은 소련, 이남(以南)은 미국이 분할점령 획정(劃定)

 

 

 

 

 

 

 

1866(고종 3)년 8월 대동강을 통해 평양으로 올라온 영국 메도우 회사가 임대한 미국 국적의 중무장한 상선 제너럴셔먼호 승조원 24명과 조선 관민의 충돌로 미국인은 3명을 포함한 영국, 중국, 말레이시아 등 총 24명이 사망합니다. 1871년 6월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리로 미국 군함 5척에 1,200여 명의 해군과 해병이 조선을 침략한 신미양요가 일어났고, 1882년 불평등한 조미수호통상항해조약을 체결합니다.

 

 

1905년 7월 일본 총리 가쓰라와 미국 육군장관(전쟁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는 일본은 조선, 미국은 필리핀을 식민지배를 인정한다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합니다. 1918년 1월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를 선언으로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던 한반도에 독립의 희망과 용기로 작용했고, 2.8 독립 선언과 3.1 만세혁명을 거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큰 계기가 됩니다.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선언과 별개는 3.1만세혁명 당시 미국 정부는 일본 주재 미국 대사에게 조선의 독립을 미국이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주지 말고, 미국이 조선인의 행동에 동조한다는 의심을 일본이 하지 않도록 지시했습니다. 1941년 12월 일본 해군이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공격하면서 태평양전쟁이 시작됩니다.

 

 

중화민국으로부터 지원을 받던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 이청천 총사령관과 김원봉 부사령관은 1942년 9월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임시정부 승인과 지원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냅니다. 1944년 중국에 파견된 미국전략사무국(OSS)과 한국광복군은 상호이익을 위해 군사협약을 맺지만, 공식적으로 미국은 1945년 8월 15일 이후에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부정했습니다.

 

 

미국은 한국광복군의 국내 진입 훈련을 지원하지만, 일제가 1945년 8월 15일 항복하면서 무산됐습니다. 미국은 일본과 전쟁이 거의 끝나가던 1944년까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준수하기 위해서인지 일제의 한반도 강제점령 문제를 철저히 외면했습니다.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 38선을 기준으로 이북(以北)은 소련, 이남(以南)은 미국이 분할점령 획정은 일방적으로 결정됐습니다.

 

 

 

 

 

 

1884년 러시아 제국은 세력 확장의 발톱을 숨기고 조선과 러시아 수호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1894년 청일전쟁을 관망했습니다. 1896년 일본군과 낭인이 조선의 국모를 시해한 을미사변이 발생했을 때 러시아 공관으로 몸을 피신하는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는 조선의 보호국을 자처하며 정부에 압력을 가하면서 이권을 가져갑니다.

 

 

1904년 2월 만주와 한반도 지배권을 놓고 벌인 러일전쟁에서 패전한 러시아는 동북아에서 물러납니다. 1917년 11월 볼셰비키 혁명으로 사회주의 국가가 된 후 유럽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합니다. 대일항쟁기(일제강점기) 소련은 일본과 독립전쟁을 벌인 독립운동가를 지원하면서 사회주의 세력을 확장했지만, 1937년 스탈린이 한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킵니다.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소련군이 파시스트 독일의 배를 갈랐다."라고 말할 정도로 소련군과 민간인 등 약 2,400만 명 이상의 희생자가 발생하면서 2차 세계대전 승전에 공헌했지만, 냉전 이데올로기로 축소된 명이 있습니다. 1941년 4월 일본과 소련은 일본이 미국을 침략할 때 절대 불가침한다는 중립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1945년 독일과 전쟁에서 승전을 앞둔 봄부터 소련은 일본과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소련이 동아시아전쟁 계획을 수립하던 5월 독일은 항복을 선언했고, 6월 말 일본과 전쟁하는 극동 작전계획이 최종 확정됩니다. 1945년 8월 9일 '일소중립조약'을 파기하고 대일본 선전포고를 합니다. 1904~1905년 패전한 러일전쟁의 치욕을 갚기 위해 만주, 사할린, 쿠릴열도 지역에서 승승장구하며 무섭게 남하합니다.

 

 

 

 

 

 

19세기 후반 동북아에서 동서양 제국주의 국가, 즉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들이 세력 확장을 위해 충돌했습니다. 미제국주의와 러 제국주의 세력은 통상과 수호라는 미명아래 19세기 후반부터 우리나라를 압박한 나라입니다. 두 나라는 19세기 후반부터 20~40년 동안 한반도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을 벌였지만, 일본 제국주의에 밀려 한반도에서 멀어진 후 일본이 패망하던 1945년을 전후한 시기에 다시 한반도에 집결합니다.

 

1907(정미)년 전라북도 순창군 농바우에서 '조선 국운(國運) 심판 공사'를 보신 후 북한의 사회주의 국가와 남한의 자본주의 국가가 수립되는 천지공사를 보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한반도는 선천 역사의 마지막 과정에서 출현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대결의 축약판입니다. 다시 말해 38선을 기준으로 한반도 이북(以北)은 소련, 이남(以南)은 미국이 분할점령을 획정(劃定)하면서 한반도 분단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앞으로 두 체제가 대충돌 하는 과정에서 선천 5만 년 역사가 끝나고 후천 5만 년 역사가 열립니다.

 

 

획정(劃定)의 사전적 의미는 '경계 따위를 명확(明確)히 구별하여 정하는 것'입니다. 명확(明確)은 명백하고 확실하게 갈라놓다는 것으로 한두 시간, 하루 이틀 만에 뚝딱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지금까지 미국과 소련의 점령군이 한반도 38선을 기준으로 이북과 이남을 분할 점령하는 여러 주장을 살펴보면 짧게는 '불과 30분 만에 결정됐다', 길게는 '1944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논의됐다' 등 여러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은 1945년 8월 9일(모스크바 기준) 구소련(現 러시아)이 대일본 선전포고 후 사할린, 쿠릴열도, 만주 등지에서 일본군을 무너트리며 무서운 속도로 남하하기 시작합니다. 소련보다 한반도에서 더 멀리 있던 미국은 8월 11일 소련에 38선을 기준으로 이북은 소련, 이남은 미국이 나누자는 분할점령 안을 제안했고 소련이 즉각 수용하면서 결정된 것입니다. 

 

 

 

 

 

<특집 병란(病亂, 팬데믹) 개벽문화 북콘서트: 20, 21, 22회>

https://www.youtube.com/watch?v=jTp2fHBjeF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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