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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도 도전道典

항일 을미의병 봉기의 도화선이 된 1895년 을미왜변과 단발령과 군수삭발령

by 도생(道生) 2022. 8. 18.

"내가 끊으면 시나브로로 다 끊어야!", "인제 죄다 깎어.... 다~ 깎어!"

항일 을미의병 봉기의 도화선이 된 1895년 을미왜변과 단발령과 군수삭발령

 

 

 

 

 

 

1894년 1월 고부봉기를 시작으로 동학농민혁명군 대대적인 활동 이후 조선 조정은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고, '톈진조약의 '동시 출병'을 명분으로 일본군도 한반도에 들어오게 됩니다. 1894년 7월 23일 얼마 전 죽은 일본의 前 총리 아베 신조의 외고조부인 오오시마 요시마사가 이끄는 일본군이 경복궁을 난입한 갑오왜란(甲午倭亂)이 일어납니다. 일본군은 고종을 협박해 김홍집 내각을 국정 전면에 내세웁니다.

 

 

1894년 7월 25일 서해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군이 청나라 함대에 선제포격한 풍도 해전(海戰)을 시작으로 사실상 청일전쟁이 시작됐고, 1895년 4월 17일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최종승리합니다. 1895년 양력 10월 8일 일본 낭인 깡패와 일본군은 총칼을 앞세워 경복궁을 점령하고 조선의 왕비를 무참하게 시해한 을미왜변(乙未倭變)을 계기로 충청도 일대에서 항일 의병 봉기가 시작됩니다. 을미(乙未, 1895)년에 봉기한 의병이라 하여 '을미의병'이라고 합니다.

 

 

 

 

 

 

 

일본 낭인 깡패와 일본군에 의해 조선의 국모가 시해되면서 백성을 분노케 했습니다. 조선 왕비 시해 이후 일본은 고종에게 단발을 강요하고, 1895년 양력 12월 30일 친일 김홍집 내각은 양력 사용 및 단발령 시행을 선포합니다. 단발령은 을미왜변으로 크게 상처받고 성난 민심을 더욱 자극합니다. 마치 불난 데 기름을 부은 격이 되면서 항일 을미의병 봉기의 도화선이 됩니다.

 

 

1895년 을미왜변이 도화선이 되어 10월부터 봉기한 항일 을미의병은 1896(병신丙申)년 3월경까지 경기, 강원, 충청, 경상, 전라 등 전국 각지에서 연속적으로 봉기했기 때문에 '을미의병'이라고 합니다. 조선(대한제국)의 단발령은 1895년 1차 단발령은 거센 저항에 부딪혀 1897년 폐지됐고, 1900년 2차 단발령이 내려졌을 때 1차 단발령처럼 큰 저항은 없었지만, 자발적 참여가 저조해지자 1902년 군인, 경찰, 관원 등 국록을 받는 일부만 특정해 강제 단발을 명합니다.

 

 

 

 

 

 

일제가 대한제국 외교권을 박탈하고 실질적인 식민 지배에 들어간 1906년 내무대신 이지용(을사오적)은 전국 각 도(道)의 군수, 주사 등 관리들에게 삭발하도록 '군수삭발령'을 지시합니다. '군수삭별령'은 조선(대한제국)이 내린 3차 단발령입니다. 항일 을미의병의 도화선이 된 을미왜변 1차 단발령 및 3차 단발령은 일본이 주도한 것이고, 2차 단발령만 대한제국의 주도한 것입니다. 

 

 

1902(임인)년 가을 증산 상제님께서는 당신님의 상투를 직접 자르시며 "내가 끊으면 시나브로 다 끊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상투 자르고 머리 깎는 개화 공사'를 처결하셨습니다. 1904년 손병희가 주도한 갑진개혁운동을 시작으로 약 20만 명의 일진회가 단발에 참여했고 1907년 순종황제는 즉위식 때 단발합니다. 순종 황제가 단발령을 내렸지만, 예전처럼 강제하지 않았고 이후 단발은 자연스럽게 자리 잡게 됩니다.

 

 

 

 

<개벽문화 북콘서트: 대전편 8, 9, 10회>

https://www.youtube.com/watch?v=g5oEu7VUI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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