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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도 도전道典

일본의 조선 침략을 예견한 의병장 조헌과 최익현의 지부상소

by 도생 2022. 8. 19.

임진왜란 전(前)과 강화도조약 때 일본의 조선 침략을 예견한 두 인물 

의병장 조헌과 최익현의 목숨 건 도끼 상소, 지부복궐상소(持斧伏闕上疏)

 

 

 

임진왜란 조헌과 의병 ↑

최익현

 

 

 

1590년 음력 3월 황윤길 등 일본으로 건너갔던 조선 통신사 일행이 1591년 음력 1월에 귀국합니다. 1591년 윤(閏) 3월 1일 왜(倭,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에 보낸 평조신과 현소 등 사신과 함께 한양에 입성합니다. 왜(倭)는 조선 침략의 음흉한 속내를 숨기고 명나라를 치러갈 테니 길을 내달라는 '가도입명(假途入明)'을 요구합니다.

 

 

강직한 성품의 기개 있는 선비였으며 임진왜란 때 700여 명의 의병(700 의총)과 함께 순절할 의병장인 중봉 조헌(1544~1592)은 22세에 성균관에 들어갑니다. 1567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파주목 교수 등을 거쳐 1574년 명나라 만력제의 생일 축하 사신단 일원인 질정관으로 북경에 파견됩니다. 북경에서 돌아온 후 호조, 예조, 사헌부 등을 거쳐 경기도 통진 현감 때 오만방자한 노비의 횡포를 보고 엄히 다스리던 중 죽게 되면서 3년간 귀양간 후 보은 현감으로 복직합니다.

 

 

일본의 조선 침략을 예견한 조헌은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에 보낸 사신을 받지 말고 일본과 관계를 끊어달라고 상소를 올립니다. 조헌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한해 전인 1591년 조선에 온 일본 사신의 목을 베라고 상소를 올립니다. 1589년(선조 22) 음력 4월 1일 조헌은 선조에게 백성 구제와 조정 대신 탄핵 등 국정 쇄신을 간하는 목숨 건 도끼 상소를 올립니다. <조선왕조실록>의 <선조수정실록>에 "조헌이 이어 도끼를 지고 거적자리를 깔고 궐문에 엎드려 명을 기다렸다."라는 '지부복궐상소'로 인해 유배를 가게됩니다.

 

 

 

 

 

 

1591년 음력 3월 1일 일본에 갔던 사신단이 돌아오자 조헌은 선조에게 상소를 올렸지만, 답을 듣지 못합니다. <선조수정실록>에는 당시의 상황을 "(조헌이) 궐하(闕下)에 엎드려 상소에 대한 비답이 있기를 기다렸으나 내리지 않자 머리를 돌에다 찧어 피가 얼굴에 가득하여 보는 사람들도 안색이 위축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의병장 조헌과 항일 의병장 최익현 선생은 모두 일본의 조선 침략을 예견한 인물입니다. 의병장 최익현 선생은 증산 상제님과 동시대 인물입니다. 일본의 조선 침략을 예견한 의병장 조헌이 목숨 걸고 올린 '지부복궐상소(持斧伏闕上疏)' 이루 280여 년이 지난 1876년 음력 1월 23일 참판을 지낸 면암 최익현은 일본의 조선 침략을 예견하고 강화도조약 체결에 반대하며 '지부복궐상소(持斧伏闕上疏)'를 올립니다. 

 

 

일본이 조선 침략을 개시한 사건은 1875년 9월 20일 일본 군함이 조선의 강화도에 불법적으로 침입해 공격한 '운요호 사건'입니다. 1876년 2월 체결된 '강화도조약'은 통상과 개항 등 일제의 일방적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인 불평등조약입니다. '강화도조약'은 일본의 조선 침략 의도가 내포됐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었기 때문에 면암 최익현 선생은 강화도 조약 체결의 숨은 의도를 예견하고 지부상소를 올린 것입니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을사늑약 무효를 주장한 최익현 선생은 1906년 6월 4일 (윤(閏) 4월 13일) 74세의 노구를 이끌고 전라도 정읍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킵니다. 의병장 최익현 선생은 1906년 6월 14일 대한제국 관군과 충돌을 피하고자 의병 해산을 명령하고 관군에게 체포되어 일본 헌병대에 넘겨지고 한성 재판에서 감금 3년 형을 받고 일본 대마도로 압송된 후 1906년 음력 11월 17일(양력 1907년 1월 1일) 순국합니다. 

 

 

1906(병오)년 윤(閏) 4월 의병장 최익현 선생이 체포됐다는 소식을 들으신 후 전라도 익산 만경리에 가셔서 의병장 최익현(1833~1906. 11. 17 음력)의 만장(輓章)을 써 주시며 명줄을 거두는 천지공사를 집행하십니다. 최익현 선생은 1873년 '계유상소'를 올리면서 고종과 흥선대원군의 천륜을 끊게 만든 불의한 장본인이면서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지부상소까지 올린 충신이기도 합니다.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며 거병한 의병장 최익현은 일본이 이미 대한제국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에서 백성들의 목숨을 담보로 거병한 것이기 때문에 대의명분은 있지만, 참혹한 결과를 가져올 것을 생각지 않았습니다. 증산 상제님께서는 천지를 감동케 한 의병장 최익현이 신하로서의 절개와 충절을 높게 기리어 만장을 지어주시고 명줄을 거두신 것입니다.

 

 

의병장 최익현 선생이 곡기를 끊고 절식(絶食) 순국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닙니다. 모멸감을 준 일본군 대대장 때문에 처음에는 단식했습니다. 며칠 후 일본군 대대장이 와서 통역 문제를 사과받고 죽을 먹었지만, 고령에 풍토병까지 얻어 병사한 것입니다. 최익현 선생의 유해가 환국한 날 쌍무지개가 뜬 것은 상제님께서 민영환에게 혈죽(血竹)을 내려주신 것과 마찬가지로 최익현의 충의로움을 표증(表證) 하신 것입니다.

 

 

 

 

<개벽문화 북콘서트: 군산편 11, 12, 13회>

https://www.youtube.com/watch?v=zKPCIjW1Nj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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