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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유럽의 왕실을 점령한 유럽 최고의 명문가이며 최대의 강력한 왕가 합스부르크 왕가(王家)

by 도생(道生) 2015. 1. 4.

유럽의 왕실을 점령한 유럽 최고의 명문가이며 최대의 강력한 왕가, 합스부르크 왕가(王家) 

 

 

 

 

 

 

합스부르크(Habsburg)라는 이름은 슈바벤(Schwaben 지방 - 현재의 스위스)에 세워진 합스부르크 성 또는 하비히츠부르크 성(매의 성)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이 가문은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프랑스 왕을 제외한 거의 모든 유럽의 왕실과 연결되는 최대의 왕가(왕가)로 그 위세를 떨친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체제는 지금의 오스트리아 역사의 범주를 넘어서는 광대한 영토를 포괄하고 있었다.

 

 

 

 

 

 

독일제국의 황제로 선출될 당시 이 명문의 귀족 가문은 엘자스, 라인강 상류, 그리고 스위스 등지에 광대한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지속적으로 정략 결혼을 통해 이탈리아의 시실리와 나폴리, 프랑스의 부르고뉴 지방, 네델란드와 스페인, 헝가리, 보헤미아 등 많은 영토와 세력을 얻어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을 건설하였고, 16세기 초 카를 5세 때부터 제국은 전성기를 맞는다.

 

 

 

 

 

 

이후 카를 5세의 아들 펠리프 2세가 스페인과 네델란드 영토를, 카를의 동생 페르디난트 1세가 오스트리아와 독일, 헝가리, 보헤미아 등을 차지하면서 나라는 스페인 - 네델란드 노선과 오스트리아 - 독일 노선으로 나뉜다.

 

 

 

 

 

 

18세기 초 남편 프란츠 1세와 공동으로 통치한 카를 6세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女帝)는, 실질적으로 국정을 담당하여 행정 제도와 교육, 문화 면에서 개혁 정책을 펴고 군대 육성에 주력한다. 그녀는 자녀를 열여섯 명이나 두었는데, 그중 맏아들 요제프 2세는 어머니의 개혁 정책을 더 강력하게 펼쳐 계몽 군주라 불렸으며 오스트리아의 문화와 예술을 꽃피우게 하였다. 그러나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가 되었다가 프랑스 혁명 때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13세기 후반부터 재배해온 합스부르크 왕조는 종교개혁 이루 카를 5세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 황제들이 적극적인 구교 수호 의지를 유지했고, 페르디난트 2세는 1619년 등극하자마자 자신의 통치권 내에 있는 모든 왕국의 이단을 근절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실천에 옮겼다.

 

 

 

 

 

 

급기야 신교탄압에 항의하기 위해 열린 프라하 신교대회(1618년)에서 황제가 임명한 프라하의 부총독을 시민들이 왕성의 창밖으로 내던져 살해한 사건을 기화로 신교(프로테스탄트)와 구교(가톨릭) 세력 사이에 '30년 전쟁'이 시작된다. 이 종교전쟁은 실제로는 합스부르크 왕조와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 간의 주도권 전쟁으로 이어지면서 중부유럽을 피폐화시켰다.

 

 

요제프 2세의 뒤를 이은 프란츠 2세는 프랑스 혁명에 대항하는 세력과 손을 잡고 개혁을 반대하며 나폴레옹과 전쟁을 치르지만, 심각한 피해를 입어 신성 로마 제국은 멸망하고 만다(1806년).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프란츠 2세(1792~1835)는 1804년 오스트리아가 황제국임을 선포하고 프란츠 1세로서 오스트리아의 첫 세습황제 자리에 오른다.

 

 

 

 

 

 

프란츠 2세는 합스부르크가의 정략 결혼 정책에 따라 자신의 딸을 나폴레옹과 결혼시키기도 하지만, 나폴레옹의 힘이 약해지자 영국, 프로이센 등 영합군과 함께 1814년 나폴레옹을 몰아낸다.

 

 

대 나폴레옹 전쟁의 전승국들은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 수상의 주도 하에 1815년 비인회의를 가지게 되는데, 이때부터 1848년 혁명 발발시까지 33년 동안 오스트리아는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럽의 정치문화를 주도하는 국가가 된다. 비인회의의 정치적 기저는 프랑스혁명 이전으로의 복귀, 왕정의 복고, 자유주의 운동의 철저한 배격이었다.

 

 

 

 

 

1848년 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혁명은 진압되지만, 그 해 5월 프랑크프르트에서 열린 독일의 국민회의의 여파로 하나의 독일로 통일시킬 독일제국의 헌법을 제정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왕권이 헌법으로 제한되는 입헌군주제를 받아들여 18세의 젊은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왕위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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