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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최초의 통사, 사마천의 『사기(태사공서)』

by 도생(道生) 2015. 1. 24.

중국 최초의 통사(通史)

사마천의 『사기(史記, 태사공서太史公書)』

 

 

 

 

 

 

중국 한(漢)나라 사마천이 평생을 공들인 필생의 역작이라 불린 『태사공서(太史公書)』는 중국의 삼국시대 이후 붙여진 이름이 더 유명하다. 중국 역사서의 대명사로 불린, 바로 사마천의 『사기(史記』)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본기(本紀)」, 「표(表)」, 「서(書)」, 세가(世家), 「열전(列傳)」 등 총 5부로 나뉘어 구성되어 있다.

『사기』는 황제에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존경받는 성인에서 지탄받는 악인까지, 역사를 움직인 영웅에서 이름없는 무명의 서민에 이르기까지 나라의 흥망과 인간 군상의 인생역정 등을 드라마틱하게 서술하고 있다.

 

 

 

 

 

 

사마천은 전한 시대 중국 섬서성 한성에서 출생하였다.

집안 대대로 주나라 사관(史官)을  지낸 사마 가문의 후손이었다. 집안의 내력과 가풍이 역사와 관련이 깊었고, 또 아버지 사마담이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으로서 그 직책이 천시되고, 옛 기록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한 마음 때문에 아들 사마천을 어렸을 때부터 의도적으로 역사가로 만들기 위해서 키웠다.

 

아버지 사마담이 사망한 후 사마천은 아버지와 같은 태사령(천문을 관측하고 역을 만들어 문헌 등을 관리하는 직책)이 되었다.

역사서를 집필하기 위해 시, 서, 춘추, 전국책 등과 당시 궁중에 있던 상소문, 각종 서적, 포고문 등의 자료를 공부하고 관련된 자료를 모으기 시작한다.

 

 

 

 

 

 

동방의 강력한 제국으로 우리 한민족의 국가였던 북부여를 침공한 중국 역사상 가장 싸움을 잘한 황제로도 불린 한무제는 동명성왕이라고도 불리는 북부여 고두막한 단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도망하였다.

 

 

 

 

 

이후 절치부심하던 한무제 유철은 한민족과 같은 동방족이었던 북방의 강자 훈족(중국이 붙인 이름, 흉노匈奴-흉악한 노예)과 전쟁을 벌인다. 한무제 유철은 훈족(흉노족)과의 전쟁에서 대패한 패배의 책임을 묻게 된다. 이릉은 5천명의 군사로 10만 훈족 기마병과 전투에서 1만 여명의 적을 살상하는 등 악전고투 끝에 중과부적으로 패배하고 포로가 되었다. 훌륭한 전투를 한 장군 이릉을 단죄하는 한무제에게 사마천은 이릉을 적극 변호하다가 사형을 선고받게 된다.

 

 

 

 

 

 

당시 제도가 사형을 면하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대부호도 감당하기 어려운 금액인 50만 전의 벌금을 내거나, 또 하나는 궁형이라는 형벌로 생식기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사마천은 치욕을 견디며 궁형의 형벌을 받고 2년의 나머지 형기를 마친 후 환괸이 된다.

 

 

 

 

 

 

한무제 유철의 곁에서 환관생활을 하며 다시 신임을 얻게 되고, 이후 중서령이라는 환관 최고의 직책에까지 오르게 된다.

한무제의 옆에서 문서를 다루는 직책인 중서령으로 10여 년간의 산고 끝에 나온 책이 바로 사마천의 사기(史, 태사공서太史公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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