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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최초 최후의 여황제 측천무후, 그녀의 글자 없는 비석 무자비(無字碑)

by 일신우일신 도생 2015. 1. 25.

천륜(天倫)까지 끊은 권력에 중독된 노예인가?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최초 최후의 여황제(女皇帝) 측천무후(則天武后)

그녀의 무덤 앞에 글자 없는 비석, 무자비(無字碑)

 

 

 

 

 

 

일반적으로 시부모를 공경하며 편히 모시고, 한 남자의 아내로 내조를 잘하며, 현명한 어머니로 살아가는 여인을 현모양처라 말한다. 시시각각 급변하는 현대 사회의 세태(世態)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지만, 현모양처란 말이 범한 여성의 표상이 아닌가 싶다. 

 

 

황제(皇帝)는 다른 말로 천자(천제지자天帝之子, 하늘의 상제를 대행하는 인간)라 한다.

하늘의 뜻을 받들어 백성을 편안하게 잘살도록 올바르게 통치하는 것이 황제의 가장 큰 의무이며 권리다.

 

 

 

 

 

 

무조(武조) 측천무후는 수나라의 2대 황제 수양제가 중국 내륙에 대운하를 건설할 당시 부자가 되어 당 태종 이연의 거병에 협력하여 당나라 건국에 건국공신이 된 무서확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건국공신의 집안에 딸로 눈에 띄는 용모와 재기를 지녔던 무조는 14세의 어린 나이에 당 태종 이세민의 후궁으로 들어가게 된다. 불과 10년 남짓 만에 남편 당 태종이 승하하자 황실의 관례에 따라 비구니로 출가하게 된다.

 

그런데 당 태종 이세민이 죽기 전에 벌써 그의 아들이며 당나라 3대 황제가 되는 당 고종 이치와 눈이 맞게 된다.

비구니가 된 무조를 황궁으로 다시 불러들인 당 고종 이치는 비록 후궁이었지만, 아버지 당 태종 이세민의 부인이며 자신에게는 어머니 되는 무조를 후궁으로 들여 살을 섞게 된다.

 

 

 

 

 

 

당 고종의 총애를 받은 무조는 소숙비, 왕황후를 누명을 씌워 차례로 죽이고 황후의 자리에 오른다.

몸이 병약하고 우유부단한 당 고종을 대신해서 정치에 간섭하던 무조는 당나라 건국 초기부터 충성을 다해온 대신들을 몰아내고 자신의 사람들로 조정을 채워 나간다.

 

황제의 권위를 강화하고 구세력을 서슴없이 숙청하며 나름  국가의 공적인 기능을 확대하여 국력을 신장시키게 된다. 

 

 

 

 

 

 

당고종의 장자인 황태자(이충)를 폐위 시키고, 자기가 낳은 아들로 황태자(이홍, 첫째 아들)를 세웠으나 죽게 되자 이현을 황태자로 다시 세운다. 그러나 얼마후 이현(李賢, 둘째 아들)을 폐위시킨다. 병이 깊던 고종이 죽자 다른 이현(李, 째 아들)이 황제가 된다. 당나라 4대 황제 중종이 등극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권력욕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중종의 측근들이 정권을 장악하려 하자 중종을 폐위시키고, 당나라 5대 황제 예종(이단, 넷째 아들)을 세운다. 예종 역시 황실과 전국에서 일어나는 반란의 책임을 떠안고 어머니에 의해 폐위되고 만다.

 

 

 

 

 

 

무조는 여러 차례의 정치적 위험과 반란의 모의를 경험하였던 터라 반대파를 매우 엄격히 감시하고 통제하는 공포정치를 하였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백성의 생활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당태종의 '정관의 치'와 맞먹는 일명 '무주의 치'라 하는 태평성대를 만들고 있었다.

 

 

 

 

 

 

무조는 결국 당나라라는 이름을 버리고 '대주大周'라는 나라 이름을 쓰게 된다.

그리고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최고 최후의 여황제로 칠순에 가까운 나이에 측천무후(則天武后) 여황제로 등극한 것이다. 

측전무후가 나이가 더 들어감에 노쇠하고 병이 조금씩 깊어지자, 재상 장간지 등이 여황제를 압박하여 폐위 되었던 중종(이현, 셋째 아들)을 황태자로 복위시키고 결국 82세가 되어 태상황(太上皇)으로 물러나게 된다. 당나라 중종은 어머니 측천무후의 손에 의해 4대 황제에서 폐위되었다가 다시 황제로 등극하게 된 것이다. 

 

 

 

 

 

 

사가(史家)들은 측천무후의 손자 당 현종의 '개원의 치'의 토대를 마련하여 번영의 기초를 쌓은 여걸로 평가하기도 한다.

측천무후는 자신의 치적(治績)이 너무 많아 비석에 다 기록할 수 없으니, 어떠한 글자도 기록하지 말고 빈 비석만 을 세워 두라고 하였다고 한다. 당 고종과 측천무후가 합장된 건릉(乾陵)에는 글자가 하나도 기록되지 않은 무자비(無字碑)가 세워져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권력에 대한 탐욕과 부자 관계인 당태종과 고종, 즉 남편이 죽자 아들과 재혼하여 자식을 낳고, 또 자신이 낳은 자식을 죽이는 등 천륜까지 끊는 행위를 한 여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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