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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도 도전道典

증산도 『도전道典』 인물열전 - 관우 -2. 대인대의의 표상, 관운장

by 일신우일신 도생 2015. 6. 12.

증산도 도전道典 인물 열전

관우 - 2. 대인대의(大仁大義)의 표상, 관운장

 

 

 

 

 

 

 

관운장은 영웅적 의기(義氣)가 충만한 인물이다.

증산도 안운산 태상종도사님께서는 "공분심(公憤心)과 의분심(義憤心)이 없으면 그건 사람이라고 할 것도 없다."라고 말씀하셨으며, 안경전 종도사님께서는 "큰 일꾼은 그만큼 자기희생의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관운장이 고향 관부(官府)의 쫓김을 받게 된 내력도 공분심 때문이었다.

관운장의 고향인 하동군(河東郡) 해현(解縣)은 예로부터 소금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런데 못된 토호 한 놈이 장양(張讓-십상시의 우두머리)의 조카인 현령(縣令)과 손잡고, 힘깨나 쓰는 건달들을 사서 그 소금밭을 독차지하고 소금장수들의 고혈을 빨기 시작하니 그 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어느 날 그 두 놈의 술자리에 뛰어들어 모두 베어 죽이게 되는데, 그 사건으로 관부에서 쫓기는 몸이 된다.

 

 

 

 

 

 

 

 

 

그러나 얼마 후 나라에서 대사면령이 내려 쫓기는 신세가 면하게 되자, 나라를 위해 일개 병사의 신분이라도 나가 싸우는 것이 마땅한 도리라 하여 행동으로 옮기려 하는데, 유비가 "관공처럼 신무(神武)하신 분이 졸오(卒伍)에 서서 싸우시겠단 말씀이오?"하고 말린다. 이에 관운장의 대답은 초연하기만 했다.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데 졸오(卒伍)와 장렬(將列)이 무슨 구분이 있겠소이까? 다만, 가진 힘과 익힌 재주를 다하여 싸울 뿐이외다."라고 말한다.

 

천하가 어지러운 때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고 싶지만, 힘이 약해 한숨을 쉬는 관운장의 모습이 그려진다.

 

 

 

 

 

 

 

 

 

증산 상제님께서도 인정해 주신 관운장의 대인대의(大仁大義) 한 면모와 자기가 모시고 있었던 주군의 현실적 입지가 불리하더라도 충성과 의리를 다해 주군을 보필하는 관운장의 모습을 생각하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도 개인의 영달과 이익보다는 국가와 민족을 먼저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맥성(麥城)이 적군에 포위되어 함락되려할 때, 제갈근이 때를 아는 자가 준걸(俊傑)이라며 후일을 기약하자는 설득을 하자, 관우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성이 함락되면 죽으면 그만이다.

 

玉可碎 而不可改其白  竹可焚 而不可毁其節

옥가쇄 이불가개기백  죽가분 이불가훼기절

 

옥은 깨져도 흰빛을 잃지 않고, 대나무는 불에 타도 그 마디가 상하지 않는다.

 

 

 

천하사 일꾼의 길

천하사를 하는 자는 먼저 망한 뒤에야 흥하고, 죽음에 들어가야 살길을 얻게 되느니라.

대장부 일을 도모함에 마땅히 마음을 크고 정대히 가져 ‘내가 죽어도 한번 해 보리라.’ 하고

  목숨을 생각지 말아야 할지니

작은 일에 연연하면 큰일을 이루지 못하느니라.

일꾼이 일을 도모함에 무서워서 못하는 것은 의기(義氣)가 부족한 연고니라.

내 일을 하다가 곤란은 있을지언정 그릇 죽지는 아니하리라.

천하사 하려다가 좀 갇히는 것이야 무서울 것이 있느냐.

爲天下者는 不顧家事니
   위천하자    불고가사
천하사를 하는 자는 집안일을 돌볼 수가 없나니

제갈량(諸葛亮)이 성공치 못한 것은 유상팔백주(有桑八百株)로 인함이니라.

수운가사에 ‘연포(連抱)한 좋은 남기 두어 자 썩었은들 양공(良工)은 불기(不棄)라도 그 말이 민망하다. 장인(匠人)이 불급(不及)하여 아니 보면 어찌하리.’라 하였나니 잘 알아 두라.
(증산도 도전道典 8:22)

 

 

 

 

 

 

 

 

 

조선에서의 관왕묘의 유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조선을 도우러 온 명나라 장병들이 말하기를 '평양전투, 홍산전투 때에 관운장의 영혼이 나타나서 왜병들을 물리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명나라의 장군인 진유격은 한양에 있는 북악산 꼭대기에 관왕묘를 세우고, 석상을 만들어 앉히고, 석상 옆에 관운장이 자기들과 조선을 도운 사실을 기록한 비를 처음으로 세웠다. 이것을 선조 39년에 서악 동대에 옮겨 다시 만들었다. 또 명나라 장군 진인이 숭례산 기슭에 두 번째로 관왕묘를 건립하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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