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년(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주역, 불요불굴(不搖不屈)의 만고명장(萬古名將) 녹두장군 전봉준
조선 고종 31년, 1894년 갑오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의 중심적인 인물은 다름 아닌 녹두장군이라 불린 전봉준 장군이다.
자는 명숙(明淑)이고, 호는 해몽(海夢), 1855년 전라북도 고창군 죽림리 당춘에서 태어나셨다.
봉준(蓬準)은 초명(初名)이며 녹두(綠豆)는 그 체구가 작아서 불리워진 별호이다.
봉건체제에 짓밟히고 있는 민권을 제창하고, 세계 제국주의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는 민족을 구하려 민중을 이끌고 무명 동학접주로 갑오동학농민혁명을 지도한 혁명가요, 사상가였다.
전봉준 장군은 불요불굴(不搖不屈)의 의지력과 탁월한 영도력을 지닌 분이었다.
조선 말기의 민란이 곳곳에서 일어났지만 대개는 조정에서 안핵사(민란을 무마 또는 진정 시키기 위해 파견된 임시 직책)를 보내면 평정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고부(古阜)의 전봉준은 그렇지가 않았다.
정월봉기(고부봉기) 후 이용태 안핵사가 역졸(포졸)을 거느리고 내려와 뿌리를 뽑겠다고 서슬이 시퍼렇지만, 이때 전봉준 장군은 이에 좌절하지 않고 무장(茂長)의 손화중과 손을 잡고 마침내 삼월봉기(백산봉기)를 일으켰다.
이어 9월에는 일본의 침략에 항거하여 다시 구월봉기(삼례봉기)를 일으켜 서울로 진격을 하다가 10월 23일 공주에서 15일 동안 일진일퇴(一進一退)를 거듭하면서 저항하였으나 패하였으며, 11월 27일 최후의 전투인 태인 전투에서도(전봉준 장군의 주력부대로서는) 패하여 결국은 갑오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돌아갔다.
갑오동학농민혁명 당시 삼남지방 각지에서 많은 접주들이 항거하여 봉기하였으나 전봉준 장군처럼 호남의 5천 군대를 거느리고 일사불란의 대오로 일본군에 최후까지 혈전을 벌인 영도인물은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충청도 관찰사 박제순은 9월 봉기 후 전봉준 장군이 논산으로 진격하여 공주감영이 위급해지자 교주 최시형이 거느리는 북접의 10만 대군을 막는 일보다도 호남의 전봉준을 방어하는 일이 더 화급하다고 천안에 머물고 있는 선봉장 이규태에게 급전을 보냈으니 이에 전봉준 장군의 위력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전봉준 장군은 다음해 2월 9일, 11일, 19일, 3월 7일, 10일 5차례에 걸쳐 일본 영사의 심문을 받고 3월 30일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 성두환과 함께 최후를 마치니 향년 41세였다.
전봉준 장군은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나는 바른 길을 걷고 죽는 사람이다. 그런데 반역죄를 적용한다면 천고에 유감이다.' 라고 개탄을 하였다.
장군은 죽음에 다달아 다음과 같은 유시(遺詩)를 남겼다.
시래천지개동방 時來天地皆同方
때를 만나서는 천지(天地)도 내 편이더니
운거영웅불자모 運去英雄不自謨
운이 다하니 영웅도 할 수가 없구나.
애민정의아무실 愛民正義我無失
백성사랑 올바른 길 무슨 허물이더냐.
위국단심수유지 爲國丹心誰有知
조국과 민족을 위한 일편단심(一片丹心) 그 누가 알리요.
갑오 동학농민혁명의 주역이며 만고의 명장인 전봉준 장군의 천추의 한이 담긴 녹두의 동요는 영원히 전해지고 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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