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韓민족의 참역사와 원형문화가 오롯이 담긴 한민족의 역사문화원전 『환단고기』
한민족의 역사문화원전 『환단고기』 편찬에 불멸의 공덕, 최고의 업적을 쌓은 고성 이씨 가문
고려의 국운이 기울던 때 행촌 이암, 복애거사 범장, 청평산인 이명은 경기도 양주의 천보산에서 유람하던 중 태소암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천보산 태소암에는 한韓민족의 상고사와 고대사를 기록한 많은 책이 있었고, 행촌 이암, 복애거사 범장, 청평산인 이명 선생은 소전거사로부터 고서를 얻게 됩니다.
고려말 수문하시중을 지낸 대학자였단 고성 이씨 가문의 행촌 이암 선생은 『환단고기』의 『단군세기』를 지었고, 복애거사 범장(범세동) 선생은 『환단고기』의 『북부여기』를 지었습니다.
청평산인 이명은 『진역유기』를 지었는데, 조선 숙종 때 『규원사화』를 쓴 북애노인은 저신이 쓴 『규원사화』가 『진역유기』를 바탕으로 썼다고 했습니다.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와 북부여기, 『진역유기』는 모두 우리의 상고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환단고기』 편찬에 최고의 업적을 쌓은 고성 이씨 가문의 행촌 이암 선생께서 67세에 『환단고기』의 『단군세기』를 지으시고, 68세가 되시던 1364년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행촌 이암 선생의 아들 이강 선생은 15세에 급제했지만, 36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납니다.
『환단고기』의 『단군세기』를 지으신 행촌 이암(1297~1364) 선생의 손자 용헌 이원(1368~1429) 선생은 세종대왕(1397~1450, 재위 1418~1450)이 재위할 때 좌의정을 지냈습니다.
세종대왕 재위 시 주목해 보아야 할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세종 7년에 단군사당을 세운 것, 두 번째는 세종 28년에 한글(훈민정음) 반포한 것입니다.
세종대왕 재위 때 좌의정을 지낸 용헌 이원 선생은 조부이신 행촌 이암 선생께서 지으신 『환단고기』의 『단군세기』를 당연히 보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환단고기』의 『단군세기』는 환국과 배달국의 정통성을 계승한 단군왕검의 옛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한 역사서입니다.
첫 번째 세종 7년 평양의 기자사당을 다녀온 (사온서 주부) 정척이 세종대왕께 기자사당에 있는 단군성조와 기자의 배향과 제례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세종대왕은 고려 때 유학자들의 주청에 의해 급조된 기자사당과 기자묘에 곁방살이를 하던 우리 민족의 시조 단군성조님 사당을 별도로 건립할 것을 지시했고 단군사당이 만들어졌습니다.
세종대왕이 종6품의 미관말직 사온서주부 정척의 말만 듣고 단군사당을 세웠다는 것은 중국(명나라)과 사대(事大)관계를 유지한 조선에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주나라를 세운 무왕에 의해 감옥이 있던 기자가 풀려나 조선(고조선)으로 도망해 기자조선을 건국했다는 소위 '기자동래설'의 가짜역사가 있습니다.
'기자동래설'의 가짜역사는 고려 때 유학자들에 의해 '기자 평양설'로 둔갑해 기자가 죽은 지 2천 수백 년이 지난 14세기에 이르러 평양에 기자사당을 세우고 가짜 기자무덤이 만들어졌습니다.
당시만 해도 일개 망명객이었던 기자를 단군왕검과 거의 동격의 시조로 여기고 있었는데, 시조 단군왕검은 기자사당에서 차별을 받으며 셋방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중화 사대주의 노예사관으로 일관한 조선 시대였지만, 세종대왕께서 기자사당 한편에서 차별을 받고 있던 단군왕검을 별도 단군사당을 만들고 차별 없이 제례를 모시게 했습니다.
두 번째 <세종실록 102권>(세종 25년 12월 30일)에 나온 내용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것이 아니라 옛 글자를 모방했다는 내용입니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9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 중성, 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이야 글자를 이루었다...." 한글은 세종 28년(1446)에 훈민정음이란 이름으로 반포되었습니다.
47대 2096년의 실재한 역사가 담은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는 고조선의 3대 단군 가륵단군께서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시어 정음(正音) 38자를 짓게 하시고 가림토(加臨土)라고 하셨는데, 한글(훈민정음)의 모태가 되는 가림토 문자가 나옵니다.
가림토 문자는 있지만, 음가를 아는 사람이 없어서 글자는 옛 글자를 바탕으로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사들이 머리를 맞대고 음가를 부여해 만들었다고 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중국과 사대관계를 유지한 세종대왕이 직접 단군사당을 건립을 지시하고, 단군기원 153년(BCE 2181년) 가륵단군 때 만든 가림토 문자가 나오는 것을 보면 좌의정 용헌 이원 선생이 필사한 『환단고기』의 『단군세기『를 세종대왕께 진상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환단고기』 편찬에 최고의 업적을 쌓은 고성 이씨 가문은 조선 초기 왕실과 인연이 깊습니다.
용헌 이원 선생과 세종대왕의 인연은 위에서 언급했고, 이원 선생의 조부로 『환단고기』의 『단군세기』를 지으신 행촌 이암 선생엑 동생이 있었습니다. 행촌 이암 선생의 동생 도촌 이교 선생의 제자가 운곡 원천석(원동중) 선생입니다.
운곡 원천석(원동중) 선생은 『환단고기』의 『삼성기』 下의 저자로 조선 3대 국왕 태종 이방원의 스승입니다.
태종 이방원은 스승 원곡 원천석(스승)의 높은 학문을 사모한 나머지 고려가 망하고 원주 치악산에 은거한 스승을 직접 찾아가 출사할 것을 부탁드렸지만, 끝내 거부했습니다.
다시 말해 태종 이방원과 아들 세종 이도는 『환단고기』 편찬에 최고의 업적을 쌓은 고성 이씨 가문의 행촌 이암 선생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아 최소한 우리의 상고 역사와 원형문화를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조선 시대는 중국의 속국 노릇을 하면서 사대주의를 국시로 삼았기 때문에 중국이 만든 가짜역사라도 진짜역사로 믿는 세상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이 단군사당 건립을 지시하고,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 나오는 옛 글자(가림토)를 모방하여 훈민정음을 반포한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화 사대주의가 극에 달했던 조선 시대에 단군사당 건립과 우리의 상고 역사를 기록한 『단군세기』에 나오는 가림토 문자를 바탕으로 한글을 만들었다는 것은 조선의 군주라고 해도 결코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세조와 예종과 성종까지 한민족의 상고 역사서를 비롯하여 여러 사서의 수거 명령을 내렸습니다.
우리의 상고사와 고대사를 기록한 역사서를 보관하고 있는 백성을 참형에 처한다는 조선왕조실록은 노예근성과 노예역사관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세조실록 7권> 세조 3년 5월 26일
팔도 관찰사에게 유시하기를,
"<고조선비사>, <대변설>, <조대기>, <주남일사기>, <지공기>, <표훈삼성밀기>, 안함로와 원동중의 <삼성기>, <도증기>, <지리성모하사량훈>, 문태산, 왕거인, 설업 등 세 사람의 기록 <수찬기소> 1백여 권, <동천록>, <마슬록>, <통천록>, <호중록>, <지화록>, <도선한도참기> 등의 서적은 개인이 간직해서는 안 되고,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하도록 하고 원하는 책으로 내려주겠다."라고 했습니다.
<예종실록 7권> 예종 1년 9월 18일
예조에 전교하기를,
"<주남일사기., <지공기>, <표훈천사>, <삼성밀기>, <도증기>, <지이성모하사량훈>, 문태, 옥거인, 설업 세 사람의 기록 1백여 권과 <호중록>, <지화록>, <명경수> 및 모든 천문, 지리, 음양에 관계되는 서적을 집에 간수하지말고 바쳐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책을 바친 자는 2품계를 올려주고, 상 받기를 원하는 자와 노비, 고발한 자에게는 면포 50필을 주고, 숨기고 바치지 않는 자는 참형에 처한다."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중국(명나라)과 사대관계를 유지한 조선이 여타 다른 서적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한韓민족의 상고사와 원형문화를 기록한 역사서를 유교의 교리를 반대하는 사문난적의 무리 또는 국가 정책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불온서적으로 취급해 엄하게 다스렸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참담한 사실은 조선의 상고 역사와 원형문화를 기록한 역사서를 보는 조선의 백성을 참형으로 다스렸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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