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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한민족9천년 역사)

동명성왕은 고구려 시조 고주몽이 아니라 북부여 고두막한 단군

by 도생(道生) 2021. 1. 30.

『환단고기桓檀古記』를 통해서만 밝혀지는 진짜 동명성왕의 정체

고구려 시조 고주몽으로 알려진 동명왕은 북부여의 고두막한 단군 

















인류 최초의 국가 환국(桓國)의 정통성을 계승한 초대 거발환 환웅천황께서 백두산 신시에 배달국을 여시면서 동방문명 시대가 열렸습니다. 신시 배달국 이후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유구한 역사와 정신문화는 사대주의와 식민주의 역사관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역사는 뿌리가 단절되고 정신문화마저도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건국신화는 역사적 사실과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특히 일제가 왜곡 날조한 소위 '한사군 한반도설', '임나일본부설',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설' 등의 가짜학설을 '정설'과 '통설'로 인정하는 

 한국 주류 강단사학이 주장하는 한국의 역사는 1,600년을 넘지 못합니다. 




인류 최초의 국가로부터 현재의 대한민국까지 이어지는 나라의 계보, 즉 국통맥에서 북부여의 역사가 갖는 의미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북부여의 역사는 고대와 상고 시대를 이어주는 중심고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일제 식민주의와 중국 사대주의 역사관을 추종하는 주류 강단사학은 중국과 일본의 왜곡된 정보만 선택하면서 해모수 단군의 북부여 역사가 사라졌고, 단군왕검의 고조선과 환웅천황의 배달국 역사까지도 모두 부정하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얼마 전 국보로 지정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중화 사관과 불교적 시각으로 쓰인 일제가 우리 역사를 왜곡 조작하는데 빌미를 제공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국보로 지정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북부여(BCE 239~BCE 58), 졸본부여(후기북부여 BCE 108~BCE 58), 동부여(가섭원부여 BCE 86~ CE 22), 서부여(연나부부여 CE 22~CE 285) 등의 여러 부여의 역사가 하나로 얽혀 있고 신화와 역사적 사실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 상고사와 고대사를 이끈 나라와 실존한 인물과 역사적 사건도 뒤죽박죽 섞여 있어 학자도 해석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한국 주류 강단사학은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이 동명왕, 즉 동명성왕이라고 주장하지만, 현존하는 우리 문헌과 유물은 서로 다르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의 사서도 동명성왕을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류 최초 국가와 한韓민족의 국통맥과 정신문화를 밝힌 정통 역사서인 <환단고기>는 고구려의 뿌리가 되는 북부여의 고두막한 단군이라고 명확하게 밝혀주고 있으며 고두막한 단군의 시대상과 북부여 이전과 고구려 이후까지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구려 때 쓰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와 중국 집안에서 발견된 '모두루묘지'에는 고구려 시조 고주몽 성제를 '동명왕'으로 기록하지 않고 '추모왕'이라고 했고, 한참 후대인 고려 시대에 쓰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고구려 시조 고주몽 성제를 '동명성왕'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후한의 왕충(BC 27~ 추정 BC 97)이 지은 <논형論衡>에는 '동명왕은 부여의 왕'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중국 문헌인 <후한서>와 <삼국지>에 나오는 부여는 해모수 단군이 건국한 북부여가 아니라 동부여가 망한 후 생긴 망명부여인 서부여의 역사입니다. 




당나라 두우(735~812)가 편찬한 <통전通典>은 <후한서>와 <위략>을 인용하여 '동명은 부여의 왕'이라고 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도 나오듯 동명성왕과 고주몽에 대한 중국 문헌 <위략>과 <후한서>와 <양서>에는 '부여의 시조가 동명'으로 기록하고 있고, <위서>와 <주서>와 <남사>와 <북사>와 <수서> 등에는 '고구려 시조가 주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18세기 청나라에서 편찬된 <만주원류고>에는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고... 동명은 남쪽으로 달아나 부여에 이르렀고, 주몽은 역시 남쪽으로 달아나 고구려에 이르렀다."라고 하여 동명왕과 고주몽을 다른 인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단군왕검의 고조선(대부여)을 계승하여 북부여를 건국한 시조 해모수 단군과 고구려 시조 고주몽 성제의 역사는 180년 이상의 차이가 남에도 불구하고 부자(父子) 관계로 만들었습니다. 고주몽 성제의 고조할아버지가 해모수 단군입니다. 



중국과 한국의 사서가 다르게 기록하고 있으며 고구려를 전후한 시대 내용을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 역사에서 위대한 군주로 추앙받는 한무제의 침략을 물리친 북부여 고두막한 단군이 진짜 동명성왕입니다. 북부여의 5세 고두막한 단군은 동명왕 재위는 22년, 북부여의 단군 재위는 27년입니다.




<환단고기> - <북부여기 上>


"(북부여 4세 고우루단군) 재위 13년 계유(단기 2226, BCE 108)년에 한漢나라 유철(한무제)이 평나(現 하북성 창려)를 침범하여 우거를 멸하더니 그곳에 4군을 설치하려고 군대를 크게 일으켜 사방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고두막한이 구국의 의병을 일으켜 이르는 곳마다 한漢나라 도적을 격파하였다. 이때 유민이 사방에서 호응하여 전쟁을 지원하니 군세를 크게 떨쳤다.


재위 34년 갑오(단기 2247, BCE 87)년 10월에 동명국(東明國) 고두막한이 사람을 보내어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로다. 장차 여기에 도읍하고자 하나니, 임금은 이곳을 떠나도록 하시오" 하니 임금께서 난감하여 괴로워하셨다. 이달에 고우루단군께서 근심과 걱정으로 병을 얻어 붕어하셨다. 아우 해부루가 즉위하였다.


<환단고기> -  <북부여기 下>


"고두막한의 재위 원년은 계유(환기 7090, 신시개천 3790, 단기 2226, BCE 108)년이다. 이때는 북부여 고우루단군 13년이다. 임금께서는 사람됨이 호방하고 영준하여 용병을 잘하셨다. 일찍이 북부여가 쇠하면서 한漢나라 도적이 불길처럼 성하게 일어나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개연히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큰 뜻을 세우셨다.


이에 졸본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호를 동명이라 하셨다. 어떤 사람은 이분을 고열가(고조선 마지막 47세 단군)의 후예라 말한다..... 재위 23년 을미(단기 2248, BCE 86)년에 북부여가 성읍을 바쳐서 항복하고 왕실만은 보존 시켜 주기를 여러 번 애원하였다. 고두막한 단군께서 들어 주시어, 해부루의 봉작을 낮추어 제후로 삼아 차릉(가섭원부여)으로 이주해 살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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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사의 잃어버린 고리, 부여사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 - 환단고기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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