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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도 도전道典

미륵존불을 친견한 진표율사가 중창한 미륵신앙의 성지 김제 금산사

by 도생(道生) 2014. 5. 6.

미륵존불을 친견한 진표율사가 중창한 미륵신앙의 성지

전라북도 김제시 모악산 금산사(金山寺)

 

 

 

 

 

 

 

 

 

미륵신앙의 성지 금산사(山寺)는 전라북도 김제시(堤市) 금산면(山面) 금산리(山里)에 소재하고 있다.

백제 법왕(서력 599년)때 창건된 금산사는 진표율사께서 미륵불을 친견하신 후에 대중창(서력 762년)을 시작하여 법상종의 미륵신앙 성지로 자리를 잡게 된다.

 

 

 

 

 

미륵불에 대한 기록은 석가모니 부처 때부터 전하여 왔으나 무착스님(인도, 무착보살)을 통해서 미륵신앙이 완전히 뿌리내려 현장 삼장(서유기의 주인공 삼장법사)을 통해서 중국에 들어왔고 통일신라시대 진표율사의 미륵불 친견으로 한반도에 완전히 미륵신앙이 자리잡게 된다.

 

 

 

 

 

 

생사(生死)를 건 망신참법(亡身懺法)으로 미륵불을 친견하신 진표율사

진표율사는 신라 성덕왕 때 완산주(전주, 完山州) 별골군(碧骨郡) 두내산현(豆乃山縣, 지금의 만경) 대정리(大井理)에서 정(井)씨 성의 아버지와 어머니 길보랑(吉寶郞) 사이에서 태어났다.

 

12세에 금산사 숭제법사 강하로 들어가 머리를 깍고 구도를 시작하였다.

숭제법사는 진표에게 사미계법을 주고 공양차제법 1권과 점찰선악업보경을 전해주면서 "너는 이 계법을 가지고 미륵, 지장 앞에서 간절히 법(法, 진리)를 구하고 참회하여 친히 계법(戒法)을 받아 세상에 널리 전하라"고 하였다.

숭제법사에게 부지런히 수행하면 1년이면 계(戒)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해들은 진표는 큰 꿈과 이상을 안고 전국의 명산대찰을 돌아다니면서 부지런히 수행하고 공부에 정진한다.

 

 

 

 

 

27세 되던 신라 경덕왕 19년(거기 760년), 쌀 두 가마를 쪄서 말린 식량을 가지고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에 있는 선계산 부사의방장(不思議方丈)에 들어갔다. 지극한 정성으로 계법을 구한지 3년이 지나도 어떠한 깨달음을 얻지 못하자 좌절과 울분을 참지 못하고 죽을 결심을 하고 천길 낭떠러지 아래로 몸을 던졌다.

그런데 몸이 땅에 떨어지기 바로 직전에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난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진표율사의 몸을 손으로 받들어 부사의방장에 살며시 내려놓고 사라졌다.

 

이에 큰 용기와 희망을 얻은 진표율사는 더욱 분발하여 생사(生死)를 걸고 3.7일(21일)을 기약하며 사람으로서는 차마 하기 힘든, 세상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참회법, 자신의 온몸을 돌로 찧고 참회하며 수행하는 망신참법(亡身懺法)을 하게된다. 이 망신참법보다 더 진실되게 자기의 생명을 아낌없이 바쳐 참회하는 법은 달리 없었다.

 

 

망신참법을 한지 3일 만에 팔과 두 무릎이 깨져나가 피가 흐르고 힘줄이 드러나 떨어져 나갔다.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수행에 들어간 진표율사는 온몸이 피로 범벅이 되어 살점이 떨어지고 뼈가 부스러져나가는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더욱 더 수행에 정진한다.

 

드디어 7일째 되던 날 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처럼,  진표율사의 지극한 정성이 마침내 하늘을 감동시켰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진표율사 앞에 불현 듯 지장보살(地藏菩薩)이 나타나 금장(비단으로 된 휘장이나 장막)을 흔들며 다가와서 진표율사를 간호하자 떨어져 나갔던 손과 발이 다시붙고 몸이 회복되었다.

 

지장보살은 진표율사의 손을 따스하게 어루만지며 "참으로 지극한 정성이로다. 그대의 정성에 감동하여 이것을 내리노라"하면서 가사와 바리때를 내려주었다.

진표율사는 지장보살의 신령스러운 감응에 용기백배하여 더욱 수행에 용맹정진하게 된다.

 

 

진표율사가 망신참법으로 수행을 시작한지 21일 마지막 날에, 문득 천안(天眼, 신안神眼)이 열려 멀리 시방세계에서 도솔천의 천주(天主) 하느님 미륵존불께서 지장보살과 도솔천중(兜率天衆)을 거느리고 오시는 모습을 보게 된다.

 

미륵존불께서 진표율사의 머리를 친히 만지시며 "참 잘하는구나, 대장부여! 이처럼 계를 구하다니 신명을 아끼지 않고 간절히 구해 참회하는구나! 내가 한 손 가락을 튕겨 수미산(須彌山)을 무너뜨릴 수 있으나 네 마음은 불퇴전(不退轉)이로다."하시며 찬탄하고 점찰경 두 권과 증과간자 189개를 진표율사에게 내려주셨다.

 

 

 "너는 이것으로써 법을 세상에 전하여 남을 구제하는 뗏목으로 삼으라. 이 뒤에 너는 이 몸을 버리고 대국왕(大國王)의 몸을 받아 도솔천에 태어나리라."하시며 천상 도솔천으로 돌아가셨다.

 

 

 

 

도솔천의 미륵불을 친견한 진표율사는 도통의 경지에서 미래에 닥쳐올 대환란과 석가모니 부처가 예언한 미륵불의 지상강세 모습을 환하게 내다보았다.

이에 미륵불께서 대환란기에 우리나라 한반도에 강세하여 주실것을 지극정성으로 기원하게 된다.

그리하여 "네가 본 나의 모습대로 불상을 세워, 나의 강세를 준비하고 미륵불의 진리를 세상에 널리 펴라."는 계시를 받고

금산사 앞 연못인 용추못을 메우고 밑 없는 시루를 세우고 미륵불존불 모양의 불상을 세우게 된다.

 

 

 

 

본래 용추못(연못)이 사답(寺沓) 칠두락(마지기) 정도의 넓이였는데 아무리 하여도 연못 중앙 부분은 메워지지 않자 미륵 불상을 세우기 위해 연꽃모양을 한 큰 바위(석조 연화대, 일명 석련대)를 놓았으나 무슨 조화인지 밤새 20여 미터나 떨어진 곳으로 옮겨져 버렸다.

 

깊은 고심을 하는 진표율사에게 "밑 없는 시루(甑)를 걸고 그 위에 미륵불을 조성하라"는 계시를 받고 현재의 밑 없는 철 시루 위에 미륵 불상을 조성하게 되었다.

 

 

 

 

진표율사는 금산사 미륵전을 완공한 후 미륵존불의 3회 설법의 구원 정신에 따라 금강산 발연사와 속리산 법주사에 미륵도량의 용화도장을 만들었다.

진표율사는 입적할 때 까지 말법의 시대에 이 세상에 강세하시는 미륵존불께서 불국토를 만드는 진정한 용화세상에 많은 중생들이 들어설 수 있도록 미륵신앙 대중화와 중생들을 교화하는데 힘쓰셨다.

 

 

 

유불선(儒佛仙) 중에 유일하게 우주의 조물주 절대자 하느님을 완전하게 감추어버린 곳이 불가(佛家)다.

물론 그 자취는 남아 있으나 그 누구도 모르게 감춰버렸다.

기성종교에서 마음 닦는데는 그 어떤 종교도 따라올 수 없었던 불교가 마음 깊은 심연 속으로 도솔천의 천주(天主) 하나님이신 미륵존불을 감춰버렸다.

 

 

북방불기(탄생 3041년, 입멸 2963년), 남방불기(입멸, 2558년) 석가모니 부처 탄생과 입멸(入滅)로 시작되는 불기(佛紀)

우리나라에서 불교가 유입된지 1600년이 넘었다. 

우리나라는 1600년을 북방불기를 사용하였다.

1956년 세계불교도우의회에서 불교 각국의 통일적 불기를 사용하자고 의결한다.

많은 논란을 거치다 1967년부터 우리나라도 남방불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당시 종정 이청담 스님)

 

석가모니 부처 이후 마하가섭존자부터 보리달마 조사까지 28 조사(祖師)가 있었다.

(선종 보리달마부터 육조 혜능까지 6조,  33조사)

 

남방불기(2558년)을 기준으로 보면 석가모니 부처 9대 법손인 복타밀다존자의 사후 2년 뒤에 석가모니 부처가 입멸하게 되는 모순이 생긴다.

BCE(기원전) 483년 석가모니 부처 입멸전 살아서 석가모니 부처의 법을  전했던 (1대 마라가섭존자 기원전 905년 입멸, 2대 아난존자 868년 입멸, 3대 상나화수존자 805년 입멸, 4대 우바국다존자 740년 입멸, 5대 제다가존자 690년 입멸, 6대 마차가존자 636년 입멸, 7대 바수밀존자 588년 입멸, 8대 불타난제존자 533년 입멸, 9대 복타밀다존자 기원전 485년 입멸) 9대의 조사가 불교가 남방불기를 사용하면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인물이 된 것이다.

 

북방불기와 남방불기의 비교되는 여러 자료가 있지만 여기서 약(略)하고...

진실로 북방불기로 맞다면 이미 정법(正法), 상법(像法)이 지나고 말법(末法)도 지났는데...

 

 

한국전쟁(6,25 전쟁) 전 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4대 사찰중에 하나였던 금강산 건봉사(강원도 고성군)

1928년(진년),  북방불기 295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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