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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치매환자, 기억 저편의 숫자들

by 도생(道生) 2014. 9. 21.

디지털 치매환자, 기억 저편의 숫자들

 

 

 

 

한 세상을 살면서 기억해야 할 숫자가 너무나 많다.

피붙이들 기념일 부터 현관문 키번호, 컴퓨터 비번, 은행계좌 등 끝이 없다. 물론 이 중에는 늘 외울 필요가 없거나,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숫자도 있다. 그러나 막상 특정 '조합'을 기억해 내려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 난감할 때가 많다.

한 지인은 휴대폰에 중요 숫자를 저장해 놓았는데 그만 '폰'을 분실해 황망했다고 실토했다.

 

 

집 전화번호까지 휴대폰에 검색한다는 디지털 치매환자가 늘고 있다는 반증이다.

종전의 아날로그시대에는 자신의 '머리'를 절대적인 저장소로 활용했다. 그런데 고도로 발달된 디지털 기기들이 등장하면서 점차 '뇌' 그 고유의 기능이 퇴화하고 있다. 이제 인간의 두뇌는 '보존'의 장이 아니라 기기를 사용하는 '수단'이 되어버린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인간의 '기억'은 정신의 고유한 능력으로, 한 인격적 존재를 세계 안에 편입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사실 말하고, 듣고, 읽고, 쓰는 활동은 뇌의 '저장' 기능에서 시작된다. 어쩌면 인간의 삶은 '저장과 기억'의 반복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전히 '어떻게' 저장하는가 하는 복잡한 신경계 문제는 수수께끼이다. 다만 '무엇을' 잘 기억하는가는 부분적으로 밝혀냈다. 인지심리학자들은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기억한다'고 결론 내렸다.

 

일본의 심리학자 요로 다게시는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싶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미리 정보를 차단하는 '바보의 벽'에 갇혀 있다고 단정했다.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자신이 선호하는 것만 선별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이다.

육체적, 정신적 행동의 반복을 통해 강화되는 뇌의 특성상 그런 대상을 잘 저장한다는 설명이다.

 

우리 주변에는 남다른 저장의 달인들이 있다. 프로야구 선수들의 타율부터 팀의 승률까지 두루 꿰기도 하고, 유명기업의 대차대조표를 모조리 외우고, 심지어 전국 도로와 철도망 구간까지 읊어대는 축도 있다. 국사나 세계사연표도 그 대상이다. 이는 선천성보다는 지속적인 관심과 집중에서 나온 후천적인 노력의 결과일 것이다.

 

故 서종주 시인은 말년에 아침마다 산 이름 100여 개를 외웠다고 한다. 백두산 2,750m, 후지산 3,776m, 몽블랑 4,807m... 이론 식으로 전 세계의 명산 이름과 높이를 되뇐 것이다. 기억력이 전반적으로 감소하는 중에 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런데 이런 고유한 '기억'활동이 갈수록 쇠퇴하고 있다는 우려가 많다.

 

저명한 IT 미래학자인 니콜라스 카는 몇 년전 '구글이 우리를 바보로 만들고 있는가>'라는 논문에서 "검색엔진을 통한 인터넷 서핑은 우리의 지식과 문화를 즉흥적이고 주관적이며, 단기적으로 접근하게 만들어 깊이를 잃어버린 지식을 양산해낸다"고 비판했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저서에서는 '인터넷이 우리의 뇌구조를 바꾸고 있다'며 '독서하는 뇌가 아니라 검색하는 뇌를 향하여 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니콜라스 카는 이제 뇌를 잃어버린 인간은 그 복원을 위해 '깊이 읽기' 를 시작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김래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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