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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3758

현모양처 신사임당 조선 중기 대학자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며 문인과 화가로 활동한 현모양처의 모범이 된 신(申)사임당 신인선 조선왕조 5백 년 역사에서 사대부 아녀자로 당호(堂號)와 이름 석 자가 모두 알려진 여성은 손가락으로 꼽는다. 조선 시대 여성 중 호(號)와 이름이 가장 많이 알려진 여성은 현모양처의 상징이 된 신사임당 신인선이다. 사대부 아녀자에서 왕의 어머니가 된 인수대비(소혜왕후, 1437~1504)는 훈민정음(언문), 한어(漢語, 중국어), 산스크리트어(범어)에 능했고, 유교의 경전뿐만 아니라 불경에도 조예가 깊은 조선 최고의 여성 지식인이었다. 인수대비는 청주 한씨다.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 문인으로 화가로 유명해진 신사임당은 평산 신씨로 본명은 신인선(申仁善, 1504~1551)이다. 당호(堂號)는 스스로 .. 2016. 11. 25.
율곡 이이와 이순신장군과 백사(오성) 이항복 율곡 이이와 충무공 이순신 장군, 그리고 오성대감 백사 이항복 율곡 이이(1536~1584)와 충무공 이순신 장군(1545~1598)은 덕수 이씨이며, 오성대감으로 잘 알려진 백사 이항복(1556~1618)은 경주 이씨다.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과거에서 아홉 번 급제한 신화의 주인공 율곡 이이는 명종 19년(1564)에 관직에 나갔고, 이조판서(정 2품)직을 마지막으로 선조 17년(1584) 세상을 떠났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선조 9년(1576)에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고, 선조 31년(1598) 삼도수군통제사(종 2품)로 임진왜란 끝자락인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 오성대감으로 널리 알려진 백사 이항복은 선조 13년(1580)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고, 선조 33년(1600)에 영의정에 .. 2016. 11. 24.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조선왕조실록) 진실일까? 거짓일까?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을 통해 본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十萬養兵設) 진위(眞僞) 논쟁 조선왕조 5백 년 역사에 수많은 사건과 인물이 있다. 5백 년 조선왕조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에는 사관(史官)이 일종의 논평 같은 주관적인 견해를 적은 의견으로 사론(史論)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사론(사필史筆)은 특별한 서술방식으로 지구촌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독보적인 가치 중에 하나다. 때론 임금과 신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사필(사론)은 두려움이 대상이기도 했다. 사론은 사건과 인물에 대해 사실에 근거하여 논평을 쓴 예도 있겠지만,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여론이 아닌 집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라는 한계도 있다. 율곡 이이는 명종 재위 말기에 조정에 출사하여 선조 재위 중기까지.. 2016. 11. 23.
율곡 이이와 어머니 신사임당 신인선(1) 조선 중기 대학자 율곡 이이와 어머니 신사임당 신인선(申仁善) -(1) 조선 중기의 대학자 우계 성혼(1535~1598, 중종 30~선조 31), 구봉 송익필(1534~1599, 중종 29~선조 32), 율곡 이이(1537~1584, 중종 32~선조 17) 3명은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학문을 논하고 돈독한 우정을 나눈 사이였다. 우계 성혼과 구봉 송익필, 율곡 이이 세 사람이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고 35년간 학문적 교류와 우정을 담아 주고받은 편지는 후대에 『삼현수간(三賢手簡)』으로 만들어졌고, 보물 1415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중기 대학자이며 정치가였던 율곡 이이는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이다.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 모자(母子)는 대한민국 화폐 초상에 함께 등장한다. 율곡 이이는 오천 원짜리 지폐.. 2016. 11. 21.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명량대첩 필사즉생(必死卽生)의 각오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왜군보다 중과부적의 상태에서 전쟁을 치렀다. 일반 백성과 의병, 승병이 합세하였지만, 수적인 열세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왜군과 맞서 싸웠다. 그리고 나라와 백성을 구하자는 뜨거운 열망은 명량대첩과 같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기적의 역사를 만든다. 최소 몇 배에서 10배가 넘는 왜군과 결전을 치른 전투로 행주대첩, 1차 진주성 전투(진주대첩), 황석산성대첩, 이치대첩 등 임진왜란의 대다수 전투가 수적 열세에서 치러졌다.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협약이 깨지자 일본은 1597년 8월 정유재란으로 다시 조선을 침략한다. 이순신 장군은 정유재란이 일어나기 전인 1597년 2월에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었다. 이.. 2016. 11. 20.
남명 조식과 의병장 곽재우 정인홍 김면 칼 찬 선비(유학자) 남명 조식 선생과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한 제자들 임진왜란 경상도 3대 의병장 - 의령의 의병장 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 장군, 합천의 의병장 내암 정인홍 장군, 고령의 의병장 송암 김면 장군 창녕 조씨 남명 조식(南明 曺植, 1501~1572, 연산군 7년~선조 5년) 선생은 조선 중기 대학자다. 조선 성리학 영남학파의 거두 남명 조식 선생의 이름 앞에는 칼 찬 선비, 대쪽 같은 선비, 실천 지식인, 조선의 참 선비 등 숱한 수식어가 붙는다. 당시 조선 성리학에서 남명 조식 선생은 경상우도의 영수였으며, 퇴계 이황은 경상좌도의 영수로 두 사람은 영남학파의 양대산맥이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상도 3대 의병장인 홍의장군 곽재우, 내암 정인홍, 송암 김면과 이노, 전치원, 하락, 조종도.. 2016. 11. 19.
임진왜란 의병장과 의병 승병 활동 임진왜란 당시 국란(國亂)극복의 주역 의병장과 의병, 승병 활동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후 200년 만에 닥친 큰 전쟁, 즉 임진왜란으로 조선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는다. 임금은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야반도주했고, 조정 신료들은 임금을 보좌한다는 명분으로 함께 도주했다. 임금과 조정 대신들이 나라와 백성을 버리자 분노한 백성은 궁에 불을 지른다. 임진왜란이 시작되고 파죽지세로 승승장구하는 왜군에게 조선 관군은 추풍낙엽처럼 연전연패한다. 임진왜란에서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나라를 구한 대다수의 구국 영웅은 의병장과 의병, 그리고 승병들이다. 이순신 장군, 권율 장군, 김시민 장군 등이 승전할 때 옆에서 조선 관군과 혼연일체가 되어 목숨 걸고 활동한 이들이 바로 조선의 백성과 의병, 승병이다. 임진왜란.. 2016. 11. 18.
임진왜란 3대 대첩 (이치대첩)권율장군 행주대첩 임진왜란 3대 대첩 - 이치대첩의 영웅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첫 번째는 1592(선조 25) 8월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대첩이고, 진주 목사 김시민 장군이 진두지휘하여 승리한 1592년 10월의 1차 진주성 전투가 진주대첩이다. 그리고 세 번째가 1593년(선조 26) 2월 권율 장군이 지휘한 행주대첩이다. 그러나 한산도대첩과 진주대첩의 승리가 있기 전 1592년(선조 25) 7월에 권율 장군은 충청도 금산(전라도 완주)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른바 이치 대첩(梨峙大捷)으로 불리는 승리였다. 이치대첩은 임진왜란 3대 대첩, 한산도대첩, 진주대첩, 행주대첩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는 큰 승리였다. 이치는 충청도 금산군과 전라도 완주군의 경계 대둔산에 있는 고개이름이다. 이치(梨.. 2016. 11. 17.
임진왜란 3대 대첩 김시민 장군 진주대첩 임진왜란 3대 대첩 - 진주(晋州) 목사(牧使) 김시민 장군 진주대첩 - 1차 진주성 전투 임진왜란 당시 조선 팔도 관찰사가 있고, 팔도 20곳에 20명의 목사(牧使)가 있었다. 목사는 무관직으로 정3품의 벼슬이다. 경상도는 상주, 진주, 성주 3곳에 3명의 목사가 다스리고 있었다. 임진왜란 3대 대첩 진주대첩을 이끈 진주 목사 김시민 장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년 전 1591년(선조 24)에 종5품 진주 판관(晋州判官)으로 부임했다.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육상에서 연전연승하며 파죽지세로 북진하였다. 그러나 병력과 군량미를 싣고 남해와 서해를 거쳐 한양으로 진격하려던 일본 수군은 이순신 장군의 조선 수군에 막혀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임금과 조정 신료들이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 2016. 11. 16.
임진왜란 3대 대첩 이순신 장군 한산도대첩 임진왜란 3대 대첩 - 충무공 이순신 장군 한산도대첩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7백 척의 왜선에 약 2만 명에 육박하는 왜군이 침략해 들어왔다. 4월 21일 대구성 함락, 4월 26일 상주 함락, 4월 27일 문경새재를 넘어 4월 28일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장군이 무너졌다. 왜군은 조선군을 파죽지세로 몰아붙여 승승장구하며 1592년 5월 3일 한양도성에 들어왔다. 임진왜란 초기 이후 육상의 조선 군대는 부산진성, 동래성을 빼앗기며 연전연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조선 왕 선조는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맹장(猛將) 신립장군을 삼도도순변사로 임명하여 왜군을 물리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믿었던 신립장군마저 왜군에 패하고 자살하고 만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선조 24) 전라.. 2016. 11.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