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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3758

서인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 조선 중기 정치가이며 대학자 서인(西人)과 노론의 영수(領袖) 우암 송시열 숭명반청, 친청배금, 사대주의, 북벌, 예송논쟁, 소인배, 송자(宋子), 당쟁을 조장한 인물, 서인의 영수, 노론의 영수, 성리학의 대가 등 우암 송시열(1607~1689) 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이다. 서인과 노론의 영수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우암 송시열은 당대와 후대의 당파와 학자에 따라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받는 등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조선의 주자가 되기를 꿈꾼 대학자이며 정치가인 우암 송시열(선조 30년~숙종 15년) 족적은 조선왕조실록에 3천 번이나 이름이 등장할 정도로 그 족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우암 송시열은 율곡 이이, 김장생, 김집으로 이어지는 서인(西人)계열이며, 퇴계 이황 등 동인(東人) 중심의 영남학파.. 2016. 12. 17.
청나라 황제 강희제와 백두산정계비 청나라 황제 강희제의 황명(皇命)으로 세워진 조선과 청나라 국경을 표시한 백두산정계비 1637년(인조 15) 병자호란이 끝나면서 청나라와 조선은 군신(君臣)관계를 맺는다. 청나라는 황제(천자)가 다스리는 나라이며 조선은 신하의 나라가 되었다. 조선 19대 왕 숙종(1661~1720, 재위 1674~1720)의 재위할 때 청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로 꼽히는 강희제(1654~1722, 재위 1661~1772)가 다스리고 있었다. 조선과 청나라 국경을 표시한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진 것은 1712년(숙종 38)의 일이다.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영산이면서, 조선의 임금 숙종과 조정 신료들 처지에서도 조선을 창업한 태조 이성계가 활동했던 지역이라 그 의미가 깊다. 장백산(백두산)은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 2016. 12. 16.
안용복 울릉도와 독도는 우리땅 노비출신으로 조선의 영토를 지켜낸 안용복 - 울릉도와 독도는 우리땅 조선 왕조는 신분사회로 노비는 조선말 신분제가 폐지될 때까지 최하위계층이었다. 관청 등 공적 기관에 예속된 공노비(公奴婢)와 양반계층, 즉 개인에게 예속된 사노비(私奴婢)가 있었다. 사노비(私奴婢)출신 안용복의 생몰연대는 미상이다. 조선 시대 노비였던 안용복을 현대에는 안용복 장군으로 부른다. 그의 활약을 기려 안용복 장군이란 칭호를 붙인 것은 불과 수십 년밖에 되지 않았다. 조선 시대 경상도 남동해안은 왜구의 노략질과 어업활동으로 충돌이 잦은 지역이다. 안용복은 경상도 동래(부산)출신이다. 1693년(숙종 19) 초봄 동래 울산 지역의 어부 40여 명이 울릉도 근방에서 고기잡이하던 중 일본 어부와 충돌하였다. 조선 측 대표로 나섰던 안.. 2016. 12. 15.
백두산 화산폭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화산 대폭발로 추정되는 약 1천 년 전 백두산 화산 대폭발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백두산 화산폭발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1대 임금 태조 이성계에서 25대 임금 철종 이변(이원범)에 이르는 472년간의 기록이다. 조선왕조실록 472년간 기록에는 백두산 화산폭발로 추정되는 기록이 나온다. 민족의 영산 백두산은 사화산(死火山)이 아니라 휴화산(休火山)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고, 내일 당장 폭발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화산분화를 잠시 멈추고 있는 살아 있는 화산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백두산 화산폭발은 대규모 화산 대폭발은 아니고 비교적 소규모의 화산폭발이다. 실록에 나온 백두산 화산폭발 기록 중에 숙종 때 일어난 백두산 화산폭발이 그 중 규모가 큰 것으로 보인다. 물.. 2016. 12. 14.
효종의 북벌정책(1, 2차 나선정벌) 숭명배금(崇明排金)의 소중화주의(小中華主義) 대명(大明) 의리론과 삼전도의 굴욕에 대한 복수 - 효종의 북벌정책 청나라의 파병 요구로 나선 1, 2차 나선정벌(러시아) 조선은 정묘호란(1627년)과 병자호란(1636년)을 겪고 오랑캐라 무시하던 청나라에 치욕을 당하고 군신(君臣)관계를 맺는다. 조선의 임금과 대명(大明) 사대주의자들은 오랑캐 야만족(청나라, 1636~1912)에 무릎 꿇고 머리 조아렸다. 그러나 효종(1619~1659, 재위 1649~1659)은 마음속으로 이미 멸망한 명나라(1368~1644)를 숭상하고 있었다. 병자호란에서 치욕을 당한 것도 모자라 조선 왕자 세 명을 비롯하여 50만 명이 넘는 조선 백성이 청나라로 끌려갔다. 인조의 큰아들 소현세자와 둘째 아들 봉림대군은 병자호란에서 .. 2016. 12. 13.
오랑캐 청나라의 조선침공 병자호란 후금(後金, 청나라)을 여진족 오랑캐로 멸시하여 자초한 병자호란 청나라의 조선 침공으로 청나라 황제에게 삼배구고두례를 올린 조선 16대 왕 인조 후금(여진족, 청나라)은 북방의 여러 부족과 내몽골을 정복하고 2대 황제 숭덕제(홍타이지)가 1636년(인조 14) 국호를 후금에서 청나라로 고쳤다. 조선의 임금과 대명 사대주의자들이 여진족 오랑캐로 업신여긴 청나라(후금)는 명실공히 제국의 위상을 갖추고, 1627년(인조 2) 정묘호란에 이어 조선을 재침공한다. 바로 인조가 삼전도에서 굴욕을 당하는 병자호란이 일어난다. 대명 사대주의자가 주도권을 잡고 있는 조선 조정은 후금을 여진족 오랑캐 이상으로 여기지 않고 있었다. 후금(청나라) 사신을 푸대접하는 등 철저하게 무시하는 등 대명 사대주의자들은 친명배금(親明排.. 2016. 12. 12.
대명사대주의가 자초한 정묘호란 병자호란 대명(大明) 사대주의(事大主義)가 자초한 국란 동아시아의 신흥 강대국 후금(청나라)의 조선 침략전쟁 -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1616년(광해군 8) 여진족 누르하치가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후금(後金, 청나라)을 세웠다. 후금(後金)은 명나라와 전쟁 중이던 1636년(인조 14) 청나라로 나라이름을 바꿨다. 1624년(인조 2) 이괄이 난을 일으킨지 한 달도 못되어 실패로 끝났지만, 그 여파로 후금(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한 전쟁인 정묘호란(1627년, 인조 5)이 일어난다.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조선은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하기도 했다. 1618년(광해군 10) 중국 대륙의 패권을 놓고 후금(청나라)이 명나라를 공격하면서 명청전쟁(1618~1644)이 시작됐다. 광해군은 비록 쇠퇴하고 있었지만 강대국인 명.. 2016. 12. 11.
후금(청나라) 조선침략, 정묘호란 병자호란 한양 도성(都城)을 3번씩이나 버리고 도망간 인조의 굴욕과 치욕 후금(청나라)의 조선 침략전쟁 -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조선왕조 5백 년 역사에서 3번씩이나 한양 도성을 버리고 도망간 임금은 조선 16대 왕 인조(1595~1649, 재위 1623~1649)가 유일하다. 인조는 내란(內亂) 이괄의 난과 후금(청나라)의 조선 침략 전쟁인 정묘호란(1627년, 인조 5)과 병자호란(1636년, 인조 14~15)의 외침(外侵) 때 도주했다. 인조반정의 명분 중 하나가 광해군이 명나라와 의리를 저버리고 오랑캐 야만족 후금(청나라)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조반정에 성공하여 보위에 오른 인조와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서인(西人)은 배금친명(排金親明)의 외교정책을 고수한다. 광해군이 국정운영에서 폐.. 2016. 12. 10.
인조반정의 논공행상 이괄의 난 인조반정의 후폭풍 반정 세력 간의 다툼인가?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반란인가? 이괄의 난 김자점, 김류, 이귀 등 서인(西人) 세력과 이괄(1587~1624) 등이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양군 이종을 왕으로 옹립하는 인조반정을 일으킨다. 일반적으로 이괄의 난이 인조반정을 이끈 공신들의 논공행상에서 2등 공신이 된 이괄이 불만을 품고 변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혹자는 인조반정에 기여한 공로를 포상하는 논공행상의 불만 때문에 이괄의 난이 일어났기보다는 반정 세력 간의 권력다툼 때문에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당시는 명청전쟁(후금이 1636년 청나라로 국호를 바꿈) 초기로 북방의 국경 경비가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었다. 인조는 이괄의 충성심을 믿었고, 그를 북방 방어를 책임지는 평안도 .. 2016. 12. 9.
불세출의 영웅에서 역적이 된 남이장군 불세출의 영웅에서 역적이 된 남이 장군 남이 장군(1441~1468)은 시대를 잘못 타고난 조선의 불세출 영웅이다. 남이 장군의 고조부는 영의정을 지낸 남재, 증조부는 영의정부사에 추증된 남경문이다. 조부는 남휘, 조모는 태종 이방원의 딸 정선공주이며, 아버지는 남빈이다. 세조와는 6촌 간이며, 예종과는 7촌 간이 된다. 남이 장군의 장인은 권람으로 한명회, 신숙주와 함께 세조의 최측근 3인방이다. 남이 장군의 본가와 처가는 당대 최고의 가문 중 하나였다. 보통 사람보다 지혜와 재능, 용맹함이 뛰어나 어려운 일을 해내는 등 좀처럼 세상에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을 말할 때 불세출(不世出)의 영웅이라 말한다. 17세에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여진족을 토벌하는 등 큰 공을 세워.. 2016. 12.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