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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3758

세종대왕과 최고의 인재집단 집현전 세종대왕의 인재 등용과 양성, 최고의 인재(人材) 집단 집현전(集賢殿) 고려는 연영전(延英殿)을 두어 능력 있는 인재를 선발하고 학문 연구를 하였다. 고려 17대 황제 인종(1109~1146, 재위 1122~1146)에 이르러 연영전을 집현전(集賢殿)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조선 건국 초기는 건국 공신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고려 출신 성리학자도 많았고 집현전도 있었지만, 유명무실하였다. 세종대왕은 최고의 인재집단이 모인 집현전을 학문연구를 넘어 백성의 질적이고 양적인 삶을 향상하며, 조선의 미래를 열어가는 국정운영의 산실로 만들었다. 조선 2대 왕 정종 1년(1399) 3월에 대사헌 조박이 임금께 집현전을 활성화할 것을 건의하였다. 정종 2년(1400) 1월에 집현전을 보문각(寶文閣)으로 고쳤다. 태종 1.. 2017. 1. 7.
천상열차분야지도와 천문학자 이순지 김담 조선의 하늘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와 천문학자 이순지와 김담 천문(天文)은 글자 그대로 하늘의 글이다. 그리고 천문(天文)은 우주에 내재(內在)한 이법(理法, 이치)을 현상세계인 하늘에 드러낸 것으로, 천문(天文)은 하늘이 낸 도리 천도(天道)이며, 하늘의 지도로서 천도(天圖)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하늘에 있는 수많은 별을 보고 아름답다 또는 무질서하게 있다고 생각한다. 천문도(天文圖)는 단순히 무질서하게 있는 하늘의 별자리 그림이 아니라, 천지시공간(天地時空間)의 변화무쌍한 모습과 하늘의 이치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런 동양의 우주관은 역사 속에서 우리 삶의 전 영역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하늘은 원만하고 땅은 방정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과 국정운영 체제, 철학, 종교, 생활, 문화 .. 2017. 1. 6.
해시계 물시계(자격루) 혼천의를 개발한 장영실 조선 세종 때 과학자로 해시계, 물시계, 혼천의, 간의대 개발에 참여한 과학자 장영실 위대한 성군 세종대왕의 치적을 뒷받침해준 과학자이며 발명가인 장영실은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신분제도가 엄격했던 조선왕조시대에 관노의 아들로 태어나 해시계, 물시계(자격루), 혼천의, 간의대 등의 개발에 참여하여 종3품의 대호군(大護軍)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세종대왕만이 장영실과 같은 노비출신을 관직에 제수한 것은 아니다. 일반적인 인사는 아니었지만, 관직이 장영실보다 더 높이 올라간 인물도 있다. 장영실의 생몰연대는 미상이다. 장영실은 동래현(현재의 부산) 관노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좋았다고 한다. 장영실의 아버지는 원나라의 사람이고, 어머니는 관노(기생)이었다는 것만 알려졌다. 간의대, 혼천의, 해시.. 2017. 1. 5.
무학대사의 계룡산 신도안 천도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 무학대사 무산된 계룡산 신도안(新都內) 천도(遷都) 계획 삼봉 정도전(1337~1398)과 무학대사(1327~1405)는 조선 건국의 쌍두마차다. 태조 이성계는 삼봉 정도전에게 스승의 예로 대했고, 무학대사에게도 스승의 예로 대했으며, 무학대사는 이성계의 정신적 지주 역할도 했다. 무학대사는 고려말 공민왕 때 왕사(王師)를 지낸 고승 나옹 화상(1320~1376)의 제자다. 새 나라 조선을 창업한 태조 이성계는 기운이 다한 개성을 떠나 도읍을 새로운 곳으로 옮기려고 준비한다. 이성계는 고려의 망령이 남아 있는 곳으로부터 하루라도 빨리 도읍을 옮기려 했다. 1392년 7월 17일에 왕위에 오르고, 한 달도 안 된 8월 13일에 한양으로 천도(遷都)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조.. 2017. 1. 4.
정몽주 단심가와 이방원 하여가 정몽주 단심가(丹心歌)와 이방원 하여가(何如歌) 이방원(1367~1422)이 새 나라 창업에 동참하자는 내용을 담은 하여가(何如歌) 시(詩)에 포은 정몽주(1337~1392)는 고려의 신하로 남겠다는 단심가(丹心歌)로 답변했다. 정몽주의 단심가 시(詩)는 그가 고려의 충신임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이다. 이방원의 지시 아래 포은 정몽주는 개성 선죽교에서 죽었다. 그리고 자신을 죽인 조선의 3대 왕 태종 이방원에 의해 죽은 지 9년이 지나 복권되고, 충절의 표상이 되어 문묘에 배향된다. 지극히 정치적인 이유로 정몽주는 문묘에 배향했고, 조선의 유학자들에 의해 성리학의 종주가 되었다. 이방원은 '하여가'로 물었고 정몽주는 '단심가'로 답하면서 두 사람의 생(生)과 사(死)는 갈렸다. 정몽주는 사후 불과 9년 .. 2017. 1. 3.
포은 정몽주와 삼봉 정도전 충절의 표상이 된 포은 정몽주와 조선의 설계자로 만고역적이 된 삼봉 정도전 포은 정몽주(1337~1392)의 생몰연대는 이견이 없으나 삼봉 정도전(1337 또는 1342 ~1398)은 출생연대와 출생지를 둘러싸고 여러 이견이 있다. 고려말의 대학자이며 정치가로 두 사람이 활동한 시기는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고려에서 조선으로 뒤바뀌던 동북아시아의 격동기였다. 포은 정몽주와 삼봉 정도전은 같은 사상을 가진 동지로 성리학적 이상 사회를 꿈꾸었다. 고려말 성균관에서 공부한 유학자, 목은 이색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학한 벗, 친명(親明) 정책을 펼친 개혁파로 친원(親元) 정책을 펼친 수구보수세력과 맞선 것이 두 사람의 공통점이다. 그러나 왕도정치를 실현하는 사회개혁의 과정, 즉 내부로부터 개혁과 역성혁명이란 방법의 .. 2017. 1. 2.
조선의 설계자 삼봉 정도전 새 나라의 아침을 연 조선의 설계자 삼봉 정도전 조선의 설계자 삼봉 정도전(1342 또는 1337~1398))은 고려 성균관(국자감) 출신의 유생이다. 포은 정몽주(1337~1392) 등과 함께 목은 이색(1328~1396)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삼봉 정도전은 고려 공민왕의 개혁에 동참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민왕이 갑작스럽게 죽고, 이인임 등 친원(親元) 정책을 주장한 수구 세력과 마찰을 빚으며 전라도 나주의 회진현으로 유배당한다. 2년여의 유배와 6년여의 유랑생활을 하면서 세상 민심이 고려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조선왕조의 설계자 삼봉 정도전은 고려왕조는 이미 회생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고, 고려 왕조를 폐하고 성리학적 이념의 새 나라를 창업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새로운 세상을 그려나.. 2017. 1. 1.
보신각(종각) 제야의 종 타종행사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종로 종각(鐘閣, 보신각)의 역사와 보신각 제야의 종 타종행사 해마다 양력기준 12월 말일이 되면 옛것(묵은해)을 보내고 새로운(새해) 것을 맞는다는 송구영신(送舊迎新)의 의미를 담아 서울 종로 보신각(종각)에서 제야의 종 타종행사를 한다. 보신각의 옛 이름은 종루(鐘樓, 종각鐘閣)다. 보신각(종각) 제야의 종 타종행사의 유래는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시절부터 비롯됐다. 일제강점기였던 1929년 경성방송국이 연말을 맞아 특별기획한 행사로 시작됐다. 종각(보신각, 종루) 타종행사의 기원은 그 의미가 지금과는 사뭇 다르지만, 조선왕조 초기부터 시작됐다. 본래 종각(보신각)에서 종을 치는 것은 도성(한양)의 4대문(四大門) 흥인지문(동대문), 돈의문(서대문), 숭례문(남대문), 숙정문(북대.. 2016. 12. 31.
임오군란, 제물포조약과 갑신정변 민씨 일파의 전횡과 신식군대(별기군)와 구식군대 차별로 1882년(고종 19)에 일어난 군사정변 임오군란(壬午軍亂), 임오군란의 피해보상을 빌미로 일본군대를 조선에 주둔시킨 제물포조약, 급진개화파의 삼일천하 갑신정변(甲申政變) 조선 후기 외척세력의 세도정치는 1800년 즉위한 순조로부터 헌종, 철종, 고종으로 이어졌다. 경주 김씨, 안동 김씨, 풍양 조씨, 여흥 민씨가 권력을 전횡하며 조선을 망국의 길로 내몰았다. 조선 후기는 외척세력의 세도정치로 조선이 껍데기만 남아 있던 때였다. 무방비상태나 다름없었던 조선이 제국주의 열강에 급속하게 문호를 개방하면서 혼란의 시기였다. 조선이 내우외환의 혼란 속에서 망국의 길을 가던 19세기 세계사의 큰 흐름은 왕조시대(봉건체제)가 마감하고 근대사회로 변모하고 있었다.. 2016. 12. 30.
일본 군함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조약 일본 제국주의 군함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조약 1868년(고종 5) 일본은 메이지유신(명치유신)을 통해 막부정권을 무너트리고 일본 왕 친정체제의 제국주의로 발돋움했다.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에 여러 차례 통상교섭을 요구하였으나, 당시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하던 시기라 성공하지 못했다. 1873년(고종 10) 고종과 중전 민씨는 경복궁 중건과 서원철폐 등의 정책으로 양반과 백성에게 민심을 잃은 흥선대원군을 최익현과 유학자를 앞세워 내쫓는다.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민씨 일파가 조정 요직을 차지하며 세도정치를 한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일본 제국주의는 쇄국정책으로 일관하던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군함을 파견한다. 1875(고종 12) 8월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에 침입하여 조선과 전투를 벌이는 사건이 발생.. 2016. 12.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