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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조선 시대 4대 사화 - 무오사화(연산군 유자광)

by 도생(道生) 2016. 10. 28.

조선 시대 4대 사화(士禍, 선비들의 재앙)

연산군 4년(1498년) 유자광 등 훈구(공신)세력이 사림(士林, 선비)세력을 숙청한 무오사화(戊午士禍)

 

 

 

 

 

 

 

 

 

 

 

 

 

 

조선 9대 왕 성종은 훈구세력이 국정을 주도하자 사림 세력을 등용하여 훈구세력의 독주를 막았다.

1494년 연산군이 조선의 10대 왕으로 즉위했다.

 

연산군 즉위 초는 사림세력과 함께 제도를 개혁해가며 태평성대를 이어갔다.

 

 

 

 

국정이 안정되자 사림세력은 임금도 성리학(주자학, 도학)의 이념에 맞춰 이상적인 군주가 되어야 한다고 하며 연산군에게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임금과 신하(사림) 간에 감정의 골은 깊어지며 대립을 하게 된다.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 윤씨의 일을 알고부터 방탕한 생활을 넘어 폭군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1498년(연산군 4년, 무오년) 조선 9대 왕 성종의 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사림세력이 큰 화를 당하는 조선 시대 4대 사화의 첫 번째 사화인 무오사화가 일어난다.

 

 

 

『성종실록』 편찬과정에서 사관 김일손(1464~1498)은 사초에 실록청 당산관 이극돈을 비판하는 글과 자신의 스승 김종직(1431~1492)이 세조의 왕위찬탈을 빗대어 비판한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넣었다.

 

 

 

이극돈이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의 승하할 때 전라감사로 있었는데 국상 중임에도 전라감사가 기생들과 어울려 놀았다고 김일손이 사초에 써넣었고, 이극돈은 그 내용을 삭제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김일손이 거절했다.

 

 

실록청 당상관 이극돈(1435~1503)은 유자광(1439~1512)을 찾아가서 말을 하고 결국 연산군에게 보고한다.

 

 

 

 

 

 

 

 

 

 

 

 

 

 

이극돈은 사림(선비) 출신이었고, 유자광 서자로 태어나 과거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직업군인(갑사甲士)으로 무인(武人)의 길을 걸었다. 이극돈은 성종의 즉위를 지지한 공로로 공신(훈구)이 되었고, 유자광은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공신(훈구)이 되었다.

 

 

 

연산군이 즉위하고는 상당수 훈구(공신)세력이 세상을 떠난 상태였고, 사림세력이 조정의 요직에 포진하고 있었다.

이처럼 연산군 재위 초기는 훈구세력보다 사림세력이 입김이 강했던 시기였다.

 

 

연산군은 사림세력과 갈등의 골이 깊어져 골머리를 앓고 있었고, 유자광은 김종직이 살아 있을 때 가까운 사이였음에도 서로에게 해묵은 감정도 있었다.

무오사화(1498년)는 연산군과 유자광, 이극돈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벌어졌다. 

 

 

 

 

 

연산군이 볼 때 김일손이 이극돈을 비판하는 내용은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으나, 연산군의 증조할아버지 세조가 왕위를 찬탈했다는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성종실록』에 올린 것은 정통성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이는 조선 7대 왕 세조, 8대 왕 예종, 9대 왕 성종, 10대 왕 연산군을 모두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조의 왕위 찬탈에 가담한 공신들도 역적으로 보는 것이 된다.

김종직은 세조 때 출사하여 성종 때까지 관직에 있었다.

 

 

 

 

 

 

 

 

 

 

 

 

 

조선 시대 4대 사화 중 첫 번째 사화인 무오사화는 유자광, 이극돈과 사림세력 간의 개인적인 감정에서 시작되었다. 

 

유자광이 김일손을 심문하면서 세조의 사생활과 단종, 그리고 황보인 김종서 등을 거론하며 사건을 키웠다.

유자광은 이 사초 사건을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빌미로 역모사건으로 몰고 갔으며 무오사화라는 피바람을 일으킨다. 

 

 

 

 

조선 시대 4대 사화 중 첫 번째 무오사화는 선비들이 재앙을 입은 사화(士禍)이지만, 실록청에서 실록을 만들던 사관(史官)들이 주로 많이 당한 재앙이라 하여 사화(史禍)라고도 한다.

 

 

김일손, 이목, 허반 권유경, 권오복 등은 능지처참형을 당했고, 다수의 사림세력이 삭탈관직되어 유배당했다.

1492년 이미 세상을 떠난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했으며 김종직의 문하의 사림세력이 대거 숙청됐다.

 

 

이극돈과 윤효손, 유순과 김전, 어세겸 등은 불충한 기록의 사초를 임금에게 직접 보고하지 않은 죄를 물어 파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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