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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도 도전道典

1912년 청나라 멸망과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과 1992년 한국과 중국 수교

by 도생(道生) 2022. 10. 9.

1912년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 멸망과

1949년 10월 1일 한족(漢族)에 의해 수립된 중화인민공화국

한국과 중국의 경제 성장을 위한 상생의 천지공사 '한·중수교'

 

 

 

 

 

 

1908(무신)년 증산 상제님께서는 중국 한족(漢族)이 주권을 회복하는 '청나라 멸망 및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과 '한중 수교' 천지공사를 처결하셨습니다. 중국 한족이 세운 명나라(1368~1644)는 오랑캐로 여겼던 만주족에 의해 멸망합니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1616~1912)는 1911년 일어난 민주주의 혁명인 신해혁명으로 멸망합니다.

 

 

1912년 신해혁명으로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1912~현재, 대만)이 수립됩니다. 1921년 모택동 등 13명이 모여 창당한 중국 공산당은 중화민국 민주당 정부와 손잡고 일본과 항일전쟁을 합니다. 공산당은 중국 대륙의 주도권을 놓고 장제스가 이끄는 중화민국 민주당 정부와 싸우는 1차와 2차 국공내전을 벌입니다.

 

 

공산당은 중화민국 국민당 정부와 국공내전 중이던 1949년 베이징과 난징을 함락한 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합니다. 1949년 12월 7일 중화민국 국민당 정부가 타이완(대만)으로 옮기면서 중국 한족이 수립한 사회주의 국가 중화인민공화국이 대륙의 주인이 됩니다. 상제님 천지공사 그대로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1912년 멸망하고 한족(漢族)이 중심이 된 중화인민공화국이 1949년 10월 1일 수립된 것입니다. 

 

 

 

 

 

 

증산 상제님께서 "25년 만이면 중국으로부터 보은신(報恩神)이 넘어오리라."라는 말씀 하셨습니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커우 공원 의거를 지켜본 중화민국 국민당 장제스 총통은 "윤봉길은 중국군 100만 명이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다."라고 극찬했습니다. 1933년 장제스와 백범 김구 선생은 난징 회담을 가졌고 매달 5,000원의 정기적 지원금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과 전쟁 후 한국의 독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지원했습니다. 

 

 

영국은 전쟁이 끝나면 인도가 독립할 것을 우려하여 1943년 3월 27일 영국 외무장관을 미국으로 보내 미국과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승인하지 않고 신탁통치에 합의합니다. 1943년 7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한 6명의 임시정부 요인은 장제스 총통을 찾아가 신탁통치 반대와 한국의 완전 독립을 중화민국이 지지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1943년 11월 27일 이집트 카이로에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 중화민국의 장제스 총통이 모여 신탁통치안이 발의될 예정이었으나 중화민국 장제스 총통의 기습적인 제안으로 한국의 완전한 독립이 보장됩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을 전개한 100여 개 식민지국 중 카이로 회담 때 독립을 보장받은 나라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유일합니다.

 

 

 

 

 

 

1960년대 초 한국과 중국은 세계 최빈국이었지만, 현재는 세계 경제 10위와 2위 대국으로 성장했습니다. 우리나라 통계청 국가통계포털(KOSIS) 자료에 의하면 1962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20달러였고 중국의 경우에는 1인당 국민소득이 70달러에 불과했습니다. 1962년 당시 아프리카의 가봉은 1인당 국민소득이 330달러, 가나는 190달러였습니다.

 

 

모택동(1893~1976)은 급진적 사회주의 건설은 인민을 더 배고프게 만들었습니다. 모택동 사후 등소평(1904~1997)은 1978년 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차 회의에서 개혁과 개방 정책을 천명합니다. 등소평이 개혁개방 정책을 천명한 다음 해인 1979년부터 한국과 중국이 한중수교를 맺은 1992년까지 중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210달러에서 350달러로 오른 반면 한국은 1979년 1,680달러에서 8,310달러로 올랐습니다.

 

 

 

 

 

 

중국은 대한민국의 최대 교역국입니다. 증산 상제님께서 "중국 인민이 부흥하여야 우리도 이어서 부흥하게 되리라."라고 한중수교 천지공사를 처결하셨습니다. 1992년 8월 24일 한국 외무장관과 중국 외교부장이 북경에서 만나 상호 불가침,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의 유일 합법정부로 인정, 상호 내정불간섭, 한반도 평화와 안정에 노력하고 자주적 통일 해결 원칙 등 6개 항의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간의 외교관계 수립에 관한 공동성명을 교환하면서 한중수교가 맺어졌습니다.

 

 

1991년 한국과 중국은 무역대표부를 설치하고 부분적이지만, 영사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1992년 한중수교 당시 중국에 대한 수출의존도는 불과 3.5%였지만, 30년이 지난 2022년 현재 한국의 중국에 대한 수출량은 약 54배 증가했고, 중국의 한국에 대한 수출은 약 30배가 늘었습니다. 2003년 우리나라 최대 수출 상대국이 되었고, 2022년 중국에 대한 수출의존도가 약 24%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개벽문화 북콘서트: 부산편 3, 4회>

https://www.youtube.com/watch?v=WrDSYrqZGz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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