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개벽중610 일본 731부대 생화학무기 페스트(흑사병) 세균전 악마의 부대 일본 관동군 731부대 생화학무기 페스트(흑사병) 생체실험 및 세균전 일본 관동군은 1933년 관동군 산하에 방역급수부(防疫給水部)라는 생화학무기 세균전을 준비한 악마의 부대를 만든다. 악마의 부대 일본 관동군 731부대는 1945년까지 전후방에서 민간인과 중국군을 상대로 일명 마루타 생체실험과 생화학무기 세균전을 자행했다. 잔악한 생화학무기 세균전을 자행한 일본 관동군 731부대는 초기 '방역급수부'라는 공식 명칭 외에도 '세균전 부대', '마루타부대, '이시이부대' 등으로 불렸다. 페스트(흑사병)은 중세 유럽을 초토화 시킨 무서운 전염병이다. 일본 관동군 731부대는 페스트(흑사병)균을 배양하여 주사를 놓거나 감염시킨 벼룩 등을 매개로 하여 마루타 생체실험을 했다. 페스트(흑사병)균에 감.. 2017. 9. 23. 일본 관동군 731부대와 화학무기 516 독가스 부대 반인륜적 무기를 만들고 실험한 악마의 부대 일본 관동군 731부대와 대량살상무기 화학무기 전문부대 516 독가스 부대 일본군과 일본 전범기업은 실과 바늘처럼 필요 불가분의 관계다. 전범기업은 일본의 침략 전쟁에 필요한 무기를 만들고, 침략전쟁 수행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 수탈을 앞장섰다. 일본군이 생물무기를 만들고 실험하는 과정에서도 전범기업의 활약이 있었고, 전범기업은 원재료를 납품하여 화학무기 독가스가 제조 생산한다. 화학무기 독가스는 특별한 기술이 없이도 만들 수 있고, 제조와 생산 비용대비 수많은 인명을 살상케 하는 대량살상무기로 강대국이 더 많이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흔히 말하듯 '가난한 나라의 핵무기'가 아니다. 대량살상무기인 화학무기 독가스는 유독성 화학물질을 살포 또는 폭탄으로 제조하여 .. 2017. 9. 17. 미국 탄저균과 일본 관동군 731부대의 마루타 탄저균 생체실험 대량의 인명을 살상하는 목적으로 제조된 공포의 백색 가루 미국 탄저균과 일본 관동군 731부대의 마루타를 대상으로 한 생화학무기 탄저균 생체실험 '역사에는 가정이란 없다.'라고 한다. 만약 2차 세계대전의 전범 아돌프 히틀러에게 면죄부를 주고, 히틀러의 후손이 독일 국민이 우러러보는 대상이라면 지구촌에 사는 단 한 사람도 용납을 못 할 것이다. 미국은 아돌프 히틀러와 똑같은 전범으로 수천만 명을 죽음으로 내몰고, 강제노역과 일본군 위안부, 생체실험과 생화학무기를 사용하는 등 반인륜적 전쟁범죄를 저지른 일본 히로히토 천황에게 면죄부를 줬고, 그 후손들은 비록 지난날과 같은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사용할 수 없지만, 일본 국민에게 신(神)과 같은 우상으로 존경받도록 해줬다. 땅속에서 포자 형태로 존재하는 탄저.. 2017. 9. 16. 일본 731부대의 악마의 무기 대량살상무기 생화학무기 악마의 부대 일본 관동군 731부대가 만든 악마의 무기 대량살상무기 생화학무기 일본과 추악한 뒷거래를 통해 자료를 모두 받아 악마의 무기 생물화학무기 최대 보유국이 된 미국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 독일군은 연합군에게 화학무기인 염소가스를 사용했다. 이후 연합군과 독일군은 서로 뒤질세라 상대방에게 대량살상무기인 화학무기를 사용하여 약 130여만 명이 죽었다. 이를 계기로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19년 베르사유 조약과 1925년 제네바 의정서를 통해 대량살상무기로 악마의 무기인 생화학무기 사용을 금지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세계 최초의 세균전은 몽골군이 흑해 연안의 카파 성에 흑사병에 걸려 죽은 시신을 투석기로 던진 것이라고 한다. 이 사건은 가장 원시적인 세균전이라 할 수 있다. 근대사에서 .. 2017. 9. 10. 마루타 생체실험의 일본 관동군 731부대 도쿄 전범재판 일본 군국주의의 첨병으로 만주를 점령한 일본 관동군 마루타 생체실험으로 악명 높은 일본 관동군 731부대의 도쿄 전범재판 1951년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휴전회담이 결렬되면 한반도에 세균폭탄 투하를 결정했다. 1951년 미군 비행기가 광주 무등산 자락에 하얀 가루를 뿌리고 난 뒤 그 지역 사람들이 온몸에 이상증세가 발생하고 재귀열병 등에 걸려 여러 사람이 죽었다. 1952년 초 생화학무기를 제조해 전투에서 사용하고, 민간인에게 마루타 생체실험을 한 일본 관동군 731부대 부대장 이시이 시로가 한국을 두 차례 극비리에 방문했고, 그 해 3월에도 한국에 있었다. 한국전쟁이 한참이던 1952년 초, 살을 에는듯한 한겨울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때 미군은 비행기에서 온갖 잡동사니를 투하한다. 미군은 북한군과 중공.. 2017. 9. 9. 일본 전범기업의 잔혹한 만행 만인갱 대학살 사건 일본 전범기업의 잔혹한 만행의 역사 - 만인갱(萬人坑) 대학살 사건 일본 제국주의는 전시체제 이전부터 자원과 인력을 수탈했지만, 중일전쟁과 국가총동원법을 시행하면서 무자비한 자원수탈과 인력수탈을 동시에 진행했다. 일본 제국주의는 침략전쟁과 전쟁범죄, 그리고 비전시(非戰時, 평상시) 체제에서 저지른 자신들이 잔혹한 만행의 역사를 철저히 부정한다. 일본군의 난징대학살(남경대학살)과 일본 전범기업이 저지른 만인갱 대학살 만행도 부정하고 있다. 자신들의 행위를 부정하기 때문에 지난날의 잘못에 대해 반성과 사과는 더더욱 하지 않고 있다. 해남도(하이난섬) 대학살과 난징대학살(남경대학살)은 각각 최소 30만 명 이상이 일본군이 저지른 잔혹한 만행에 살해됐다. 만인갱 대학살 사건은 최소 1백만 명에서 최대 수백만 명.. 2017. 9. 3. 일제의 만행 난징대학살(남경대학살)과 만인갱 대학살 일제의 만행 남경대학살(난징대학살)과 만인갱(萬人坑) 대학살 중국 정부는 70여 년 동안 대일항전 기간을 1937년 중일전쟁부터 1945년까지 8년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최근에 중국의 대일항전 기간을 1931년 만주사변부터 1945년까지 14년이라고 하며 기존 주장을 바꿨다. 중국 정부는 1894년 12월 불과 나흘 동안 저지른 여순대학살부터 난징대학살(남경대학살)과 만인갱 대학살을 비롯하여 1945년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중국인 사상자 수가 군경과 민간인을 포함하여 무려 3,500만 명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일본 제국주의의 중국인 대학살 만행이 시작된 것은 1894년 청일전쟁 당시 만주 요녕성(량오닝성)의 여순(旅順) 지역에 살던 중국 민간인을 대학살 하면서부터다. 일반적으로 중일전쟁 당시 일제가 저.. 2017. 9. 2. 일본군의 해남도(하이난섬) 조선인 천인갱 학살사건 2차 세계대전이 종전(終戰)된 후 비전시(非戰時, 평상시) 상태에서 일본군이 저지른 대학살 만행 일본군의 해남도(하이난섬) 조선인 천인갱 학살사건 20세기 초부터 제국주의 열강들은 해남도(하이난섬)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해남도(하이난섬)는 지리적 요건과 함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물적 자원이 풍부했다.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은 중국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비행기로 중국 본토 공격과 동남아를 집어삼키기 위한 최적의 장소로 해남도(하이난섬)를 선택했다. 일본군에게 해남도(하이난섬)는 대동아 공영권 건설을 위해 남중국해의 제해권과 제공권을 장악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전쟁에서 일본군과 함께 점령지에 반드시 동행하는 것이 전범 기업 진출이다. 일본군은 1940년부터 민간기.. 2017. 8. 27. 일본군 해남도(하이난섬) 대학살 만행과 천인갱 학살사건 천인공노할 일본 제국주의의 대학살 만행 일본군의 해남도(하이난섬) 대학살 만행과 한국인 천인갱(天人坑) 학살사건 일본 제국주의는 1937년 중일전쟁과 1942년 태평양전쟁으로 전선을 확대했다. 일본군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의 전시(戰時) 및 비전시(非戰時, 평상시)체제에서도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군의 대학살 만행으로는 세상에 잘 알려진 난징대학살(남경대학살)을 비롯하여 난징대학살 못지않게 수십 만의 민간인을 대학살 한 만인갱(萬人坑)과 휴양지로 널리 알려진 하이난섬(해남도) 대학살이다. 난징대학살과 만인갱, 해남도(하이난섬) 대학살의 공통점은 일본군이 저지른 전쟁범죄이면서 민간인 대학살 만행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난징대학살과 만인갱 대학살, 해남도 대학살 만행에는 중국 군경이 포함되어 있.. 2017. 8. 26. 일제의 한국인 강제징용자 대학살 만행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일제의 한국인 강제징용자 대학살 만행, 폭발로 위장한 집단살인 사건 돌아오지 못한 귀국선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1937년 12월부터 약 6주간 자행된 난징대학살(남경대학살)은 일제의 잔혹한 대학살 만행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일제의 잔혹한 대학살 만행은 중국인에 국한되지 않았다. 1876년 일제와 불평등 강화도조약을 맺은 이후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한국인 약 8백만 명이 일제의 잔혹한 만행에 대학살 당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만 해도 약 30만 명의 한국인이 일제의 총칼 아래 죽어갔다. 조선의 관군도 동학 농민혁명군 진압에 동원됐지만, 일제가 전투를 진두지휘하며 당시 최신식 연발 기관총 난사해 대학살을 자행했다. 1945년 8월 15일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뒤에도 일제의 잔혹한 대학살 만.. 2017. 8. 20. 이전 1 ··· 14 15 16 17 18 19 20 ··· 6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