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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610

일제강점기 오키나와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일제강점기 태평양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사망한 조선인 강제징용과 강제징집, 일본군 위안부 희생자 일제에 의해 오키나와로 끌려간 조선인 강제징용, 강제징집, 위안부 피해자 일제강점기 일본에 의해 강제징용과 일본군 위안부 등으로 오키나와를 비롯한 140개 유구열도(류큐열도)에 끌려와 사망한 조선인 숫자는 파악이 안 된다. 오키나와(沖繩)는 일본이 메이지유신 이후 류큐왕국을 강제병합하고 붙인 이름이다.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한 일본 왕은 미국의 맥아더에게 오키나와(류큐왕국, 유구열도)를 일본에서 분리하지 말고, 오키나와의 주권은 일본에 그대로 놓아둔 채 미국이 원하는 기간 동안 오키나와를 조차하는 형식으로 점령하라고 했다. 일본과 미국의 밀약으로 류큐왕국(오키나와를 비롯한 14개 섬) 국민들은 100여 년 동안 일.. 2017. 7. 16.
미국과 일본 최초의 지상전투, 오키나와 전투(상륙작전) 일본 영토에서 벌어진 미국과 일본의 최초의 지상전투, 오키나와 전투(상륙작전) 오키나와(류큐 왕국, 오키나와 본섬을 비롯한 140개 섬)는 수백 년 동안 조선, 일본, 중국 등과 교류를 한 독립국의 섬나라였다가 메이지유신(명치유신) 이후 일본에 강제 병합됐다. 1943년 11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중국의 장제스 총통이 일본과의 전쟁과 일본 영토 문제에 대한 카이로 선언을 발표한다. 루즈벨트는 장제스 총통에게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한 다음 중국이 원한다면 류큐(오키나와를 비롯한 140개 섬)를 주겠다고 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으로 오키나와는 미국이 점령한 식민지 아닌 식민자가 되었다. 미국의 점령 아래 있던 오키나와는 19.. 2017. 7. 15.
도쿄대공습(동경대공습)과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미국의 일본 본토 초토화 작전 동경대공습과 도쿄대공습에 숨진 1만여 명의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일제강점기 일본이 조선인을 강제동원한 방식은 크게 3가지다. 조선인을 일본군과 군속(군무원)으로 강제징집하여 전쟁의 총알받이와 강제노역에 동원한 것, 조선인을 일본의 침략전쟁에서 필요한 군수기지 건설과 군수물자 조달을 위해 무기 제조와 석탄 채굴 등에 필요한 남녀 인력을 강제노역시킨 강제징용, 조선인 여성을 꼬임과 협박 등으로 강제연행하여 일본군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일본군 '위안부' 등이다. 1939년 일본의 국가총동원법과 국민징용령이 공포되기 이전인 20세기 초부터 학업, 또는 직업을 찾아 조선인이 본격적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의 강제연행, 강제징용에 끌려온 조선인도 많았지만, 일본에 수년에서 수십.. 2017. 7. 9.
미국의 일본 본토 융단폭격 도쿄대공습(동경대공습) 미국의 무자비한 살육과 초토화 작전, 일본 본토 융단폭격 도쿄대공습(동경대공습) 근현대사 전쟁뿐만 아니라 고대의 침략전쟁을 일으킨 국가는 일방적인 주장이지만, 나름 자국의 전쟁 참여를 정당화하는 전쟁 명분을 내세운다. 전쟁이 일단 벌어지면 군인과 민간인의 구분이 없고, 전후방이 없으며 오직 광란의 살육과 공포만 있을 뿐이다. 전쟁에서 피비린내를 맡은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미쳐 날뛰게 된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벌어진 태평양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본의 강제연행으로 전쟁의 최전방과 후방에서 강제징용, 강제징집 등으로 끌려간 조선인 희생자의 숫자는 파악할 수 없고 그냥 추정만 할 뿐이다.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주의가 일으킨 태평양전쟁은 일본과 연합국의 전쟁이라고 말하지만.. 2017. 7. 8.
군함도(하시마섬 탄광) 강제징용 피해자 201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군함도(하시마 섬 탄광)와 한국인 강제징용(강제노역) 피해자 일본은 동양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룬 나라다. 혹자는 일본 근대화와 산업화가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인을 강제징용으로 끌고 가 이루었다고 주장하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일본은 강제징용을 본격화한 1939년 말 이전인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이미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루었다. 일본은 지난 2015년 지옥섬으로 불린 군함도(하시마 탄광)를 비롯한 23개 시설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데 성공했다. 일본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을 하는 과정에서 대한민국은 군함도(하시마 탄광)를 비롯한 23곳 중 7개 시설이 일제강점기 한국인이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시설이라 세계문화유산 등재 보류 또는 일본의 강제징용.. 2017. 7. 2.
군함도 강제징용 생지옥 하시마섬 탄광 군함도(軍艦島) 강제징용(강제노역): 조선인에게 생지옥과 같았던 하시마섬 탄광 우리나라 석탄산업은 19세기 말 일본인에 의해 탄전(炭田)이 조사되었고, 일제강점기 일본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의 문경 탄광(남한)이 채굴을 시작했다. 탄광산업의 전성기라고 하는 1960~70년대 흔히 탄광을 '막장'이라고 불렀다. 광부라는 직업이 그만큼 위험하고 힘들었다는 의미였다. 수십 년 전 사용하던 막장이라는 의미는 아직도 부정적 또는 극단적 의미로 많이 사용하고 있다. 군함도(하시마섬) 탄광으로 강제징용 당하여 끌려간 한국인 피해자들은 하시마섬 탄광을 생지옥과 같은 지옥섬이라고 했다. 일본 제국주의는 19세기 말부터 침략전쟁을 일으켰고, 식민지와 점령지 국민을 자신들이 저지른 침략전쟁에 강제동원했다.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2017. 7. 1.
미쓰비시 소유의 단도와 군함도 해저탄광 일제강점기 강제노역의 비참한 삶의 현장 나가사키 해저 탄광 미쓰비시 소유의 고도(高島) 다카시마 탄광과 지옥섬 단도(端島, 군함도:군칸지마)의 하시마 탄광 일본 제국주의가 일으킨 침략전쟁의 정점에는 히로히토 일본 왕이 있었다. 그러나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전범재판)을 주도한 미국 측의 은혜로 히로히토는 처벌을 받지 않았다. 미쓰비시 그룹은 일본 제국주의의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끈 대표적인 재벌 그룹이면서 전범 기업이다. 일본인과 점령지 국민을 강제노역시켜 전쟁에 사용하는 무기와 물자를 생산하고 수송한 미쓰비시를 비롯한 일본 재벌 역시 미국 측의 큰 은혜로 전범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지난 2015년 미쓰비시의 머티리얼(옛 미쓰비시 광업) 기무라 히카루 상무가 미국을 방문하여 미쓰비시 탄.. 2017. 6. 25.
다카시마탄광과 지옥섬 군함도 하시마탄광 일제강점기 강제징용(강제노역)의 비참한 삶의 현장 나가사키 해저 탄광 나가사키 앞바다에 있는 지옥섬 고도(高島)의 다카시마 탄광, 지옥섬 군함도(軍艦島, 단도端島)의 하시마 탄광 일본은 19세기 중엽 서양의 문물과 기술을 빠르게 받아들여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루면서 제국주의로 발돋움하였다. 일본 근대화의 핵심 산업으로 크게 철강과 조선, 그리고 석탄산업을 꼽는다. 일본 규슈 후쿠오카의 지쿠호 지역은 일본 최대의 탄광 지역으로 2차 세계대전 말기에는 지쿠호 지역의 300여 개 탄광에서 일본 석탄 생산량의 절반 가까이 생산해 냈다.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강제로 병합되고 나서 돈을 벌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인과 1930년대 말 일본의 국가총동원법이 공포되고 강제징용(강제노역)으로 끌.. 2017. 6. 24.
일본 총리와 각료(장관) 국회의원 야스쿠니 신사참배②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 야스쿠니 신사(정국신사靖國神社) 일본 총리와 각료(장관), 국회의원(중의원과 참의원)의 야스쿠니 신사참배② 일본 왕 명치(메이지, 무쓰히토)와 아들 대정(다이쇼, 요시히토), 손자 소화(쇼와, 히로히토)는 침략 정복 전쟁에 미쳐있었다. 미치광이 일본 제국주의는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점령지를 폐허로 만든 장본인이다. 일본 패망 후 미국을 비롯한 11개국의 연합국이 일본의 침략전쟁인 태평양전쟁(2차 세계대전) 전쟁범죄 책임자를 처벌하는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을 시작했다. 극동국제군사재판은 미국이 사실상 주도하면서 전쟁범죄의 최고책임자 일본 왕에게 면죄부를 준다. 일본 헌법 위에 군림하고 일본을 통치하여 침략전쟁을 일으킨 최고 책임자인 일본 왕은 연합국(미국)의 특혜로 전범에서 제외.. 2017. 6. 18.
일본 총리와 각료(장관) 국회의원 야스쿠니 신사참배① 일본 총리와 각료(閣僚, 장관), 국회의원 군국주의의 상징 야스쿠니 신사참배 ① 막부시대 상징적인 존재로 사실상 허수아비였던 일본 왕은 메이지유신(명치유신) 이후 살아 있는 신(神)으로 화려하게 부활했고, 국가 자체였다. 명치(메이지) 일본 왕을 위해 싸우다 죽은 이들은 야스쿠니 신사(초혼사招魂寺, 정국신사靖國神社)를 세워 충성과 호국의 상징으로 추켜세우며 '일본의 신'으로 추앙했다. 야스쿠니 신사는 살아 있는 신(神)인 일본 왕의 명(命)으로 건립된 신사다. 일본 왕이 직접 참배하는 야스쿠니 신사는 굳이 법제화하지 않더라도 천황의 신민이라면 누구도 예외 없이 신성한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를 해야 했다. 천황의 신민으로서 일본 제국의회 국회의원, 내각 총리와 각료(장관) 등을 비롯하여 침략전쟁을 위해 전쟁.. 2017. 6.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