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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610

일제의 식민통치 방식 무단통치 문화통치 민족말살통치 정책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강제병합한 일제가 시대별 식민통치 방식 일제의 식민통치 방식 무단통치, 문화통치, 민족말살통치 정책 일제는 불평등한 강화도조약(1876년) 이후 패망하는 그 날까지 철저하게 무력으로 우리 민족을 탄압했으며, 36년간의 일제강점기에는 무단통치, 문화통치, 민족말살통치 정책 등의 식민지통치방식을 이어갔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통치 방식 무단통치, 문화통치, 민족말살통치는 큰 틀에서 보면 황국사관의 황국신민화 정책, 내선일체(일선동조론)를 위해서 시대와 환경에 따라 사용한 식민통치 정책이다. 일제는 명치유신을 전후하여 조선을 정벌한다는 정한론(征韓論)과 대동아공영론을 바탕으로 무력으로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했다. 일제는 한민족을 황국신민화하기 위해 민족혼을 뿌리 뽑아버렸고, 자원을 수탈하고.. 2017. 4. 16.
의열단 단원 나석주 의사의 폭탄투척 의거 항일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 단원 나석주 의사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 폭탄투척 의거 조선총독부 산하의 동양척식회사와 조신식산은행은 일제가 조선 경제를 착취한 경제수탈 중추기관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영국의 동인도회사를 본뜬 국책회사로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주의에 강제병합되기 전인 1908년 대한제국의 경제를 독점하고 토지강탈과 자원수탈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조선식산은행(現 한국산업은행)은 동양척식회사와 함께 조선 경제 수탈의 중추기관으로 전쟁에 미친 일제가 조선의 쌀을 대량으로 일본에 들여가는 소위 '산미증식계획(1902~1934)'에 자금줄 노릇을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장 백범 김구의 경호원이며 의열단 단원으로 동양척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에 폭탄투척 의거를 한 나석주(1892~1926) 의.. 2017. 4. 15.
일본 간토 지역 관동대지진(동경대지진)과 조선인대학살 일본 간토 지역이 초토화된 관동대지진(동경대지진)과 일제의 만행 조선인 대학살 사건(관동대학살) 근대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인 대학살을 시작한 것은 1894년 동학농민 혁명 때였다. 동학농민 혁명 때는 조선 군인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30만 명의 동학 혁명군 대다수가 일제의 총칼 아래 희생됐다. 1937년 일제가 20만~30만 명에 이르는 중국인을 학살한 난징대학살의 만행을 자행했는데, 조선은 그보다 40년 전에 이미 30만 명 이상이 대학살을 당했다. 일제는 조선의 국모를 시해하면서 수십 명, 조선의 식민지화 하는 과정에서 항거한 조선인을 무참하게 학살하였고, 3.1만세 운동과 간도대학살(경신참변) 등에서도 조선인을 대학살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제는 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간토) 지역에서 대.. 2017. 4. 9.
의열단 단원 김상옥 의사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항일무장독립투쟁 비밀결사조직 의열단 단원 김상옥 의사(義士) 일제강점기 왜경(倭警)의 심장부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 일제강점기 종로경찰서는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투쟁한 항일독립운동가를 체포하고 혹독한 고문을 자행하는 등 독립운동 탄압의 상징기관으로 수많은 독립투사가 고초를 당한 악명 높은 곳이었다. 일제 경찰의 심장부와 같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의열단 단원 김상옥(1890~1923) 의사는 한양에서 태어나 자랐다. 김상옥 의사는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좌절하지 않고 일하면서 학업을 계속했다. 자수성가하여 경제적으로 자립한 김상옥 의사는 영덕철물상회를 운영했고, 말총 모자와 일반생필품을 만들어 팔았다. 김상옥 의사는 뜻을 같이하는 한훈, 유장렬 등과 대한광복단을 결성하고 전라도 지역 친일파를 처단.. 2017. 4. 8.
일제의 잔학한 만행 간도참변(경신참변, 간도대학살)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대첩에서 패배한 일제가 간도의 조선인을 무차별 보복 학살한 만행 간도참변 일제의 잔학한 만행 간도 대학살(경신참변) 1920년 6월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을 비롯하여 안무 장군의 국민회군, 최진동, 최운산, 최치흥 3형제의 군무도독부가 연합한 '대한북로독군부'는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에 승리를 거뒀다. 독립군에 패한 일제는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는 독립군을 토벌할 계획을 세웠다. 1920년 8월 일본군은 먼저 중국 영토였던 만주에 들어갈 명분을 만들기 위해 중국 마적단을 매수하여 훈춘성을 공격해 중국인과 조선인 등을 죽이고, 일본영사관을 습격하게 하였다. 훈춘사건을 조작한 일본군은 수만 명을 동원하여 대대적으로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 1920년 10월에는 대한독.. 2017. 4. 2.
항일비밀결사조직 의열단과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 무장독립투쟁단체 항일비밀결사조직 의열단(義烈團)을 창립한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 일제의 대한제국 강제병합과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기 위해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약 3개월간 한반도 전역에서 비폭력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비폭력 3.1만세 운동을 일제는 총칼을 앞세워 무력으로 진압했고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다. 1919년 3.1운동 직후 출범한 국내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된다. 약산 김원봉을 비롯한 애국지사들은 무력을 앞세운 일제에 대항하여 조국의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3.1만세 운동과 같은 비폭력 독립운동이 아니라 강력한 무장독립투쟁단체가 필요하다고 뜻을 모았다. 약산 김원봉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초기에 무장독립투쟁을 주장하면서 임시정부에 참여하지 않았다. .. 2017. 4. 1.
안무 최진동 홍범도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대첩(전투) 안무, 최진동 3형제, 홍범도, 김좌진 장군의 항일무장투쟁사 최대 승리 청산리대첩(전투) 청산리대첩(전투)은 1920년 10월 21일부터 6일간 일본군 5천여 명과 대한독립군 연합부대 약 2천여 명이 맞붙어 일본군을 대파한 전투로 항일무장투쟁사에서 가장 큰 승리다. 1920년 6월 7일 대한제국 군대 교관 출신 항일독립운동가 안무 장군의 , 청나라 군대 간부 출신 최진동, 최운산, 최치흥 3형제의 , 평민 항일의병장 출신 홍범도 장군의 가 연합한 가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며 승리를 거두었다. 안무, 최진동 3형제, 김좌진 장군은 모두 군 간부 출신이었고, 유일하게 홍범도 장군만 평민 의병장 출신이다.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독립군 부대가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진공하여 일본군 헌병순찰대와 관공서 등.. 2017. 3. 26.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장군과 봉오동 전투 항일 의병장 출신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여천(汝千) 홍범도 장군과 봉오동 전투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장군(1868~1943)은 19세기 말 일제에 항거하며 분연히 일어선 항일 의병장 출신으로 머나먼 이국땅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약 50년 동안 무장투쟁을 한 독립운동가다. 평민 출신의 의병장 여천 홍범도 장군은 대한의 백성에게는 항일투사로 추앙받았으며, 일본 제국주의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무서운 존재였다. 평양에서 평민의 아들로 태어난 홍범도 장군은 어려서 조실부모하고 10대 중반에 평양 감영에 입대했다가 부정부패가 판치는 군대의 부조리를 보고 병영을 탈출한다. 머슴과 사냥꾼, 노동자로 떠돌던 홍범도 장군은 금강산에 있는 절에 들어가 한동안 지냈다. 일제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수많은 우리 동포를 .. 2017. 3. 25.
항일독립운동의 요람 신흥무관학교 무장독립투사를 배출한 항일독립운동의 요람 신흥무관학교 1905년 일제는 을사늑약을 강압으로 체결하면서 대한제국의 외교 주권을 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사실상 식민통치를 시작한다. 1907년 대한제국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애국지사들이 대한의 자주독립을 위한 비밀결사조직 신민회를 만든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늑약과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는 등 침략야욕을 가속한다. 1909년 신민회 간부들을 중심으로 모여 만주에 국권 회복을 위한 독립군 양성 기지를 만들 것을 논의한다.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한 일제는 이른바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105인 사건, 신민회 사건)'을 날조하여 신민회 소속 애국지사들이 대거 체포되었고, 1911년 국내 신민회 .. 2017. 3. 19.
항일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에 맞선 항일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조선 중기 영의정을 지낸 경주 이씨 백사(白沙) 이항복은 오성이란 별칭으로 더 유명하다. 오성대감 백사 이항복의 9대손이 조선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이다. 명문가의 후손으로 한성판윤과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넷째 아들이 우당 이회영(1867~1932)이고, 다섯째 아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1919년) 초대 법무 총장과 대한민국(1948년) 초대 부통령을 지낸 성재 이시영(1868~1953)이다. 우당 이회영은 19세기 말부터 항일의병에게 자금을 조달해 주었으며, 을사오적 암살을 준비하기도 했다. 1905년 을사늑약과 107년 정미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과 고종황제를 강제퇴위, 군대 해산, 입법, 사법, 행정 등 내정에 직접 간섭.. 2017. 3.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