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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610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 105인 사건(신민회 사건) 일제가 조작한 조선총독부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 105인 사건(신민회 사건)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민족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105인 사건(신민회 사건)의 시발이 된 인물 안명근은 안중근 의사의 사촌 동생이다. 1910년 일본 제국주의는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하고 조선총독부가 무단통치를 시작한다. 1910년 말 안명근이 군자금을 모집하다 민병찬, 민영설 등의 밀고로 체포된다. 안명근의 체포와 함께 황해도 안악 지방을 중심으로 약 160여 명이 체포된 안악사건(군자금 모금 사건)을 일제 총독부가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으로 조작하면서 민족해방운동 인사들을 탄압하면서 '105인 사건(신민회 사건)'으로 확대한 것이다. 일제가 확대, 조작, 날조한 이 사건.. 2017. 3. 12.
조선(한국)통감부와 일제 식민통치 조선총독부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한 조선 통감부(한국통감부)와 일제 식민통치 중추기관 조선총독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1906년 조선 통감부를 설치되면서 일제의 식민통치가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1910년 8월 29일 일제의 강압에 대한제국은 국권이 강탈당하고 조선 통감부는 해체되고, 조선총독부로 확대 개편하면서 식민통치가 시작된다. 1905년 11월 17일 일제 특명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 주한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는 을사오적인 이완용, 이근택, 박제순, 이지용, 권중현 등과 결탁하여 고종황제를 위협하고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 외교권을 빼앗았다. 1906년 2월 1일 일본 국왕의 직속 기관 조선 통감부(한국통감부)가 설치되고 민족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조선 통감.. 2017. 3. 11.
여성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 대한의 자주독립을 외치다 순국한 여성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 19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한 유관순 열사는 여성독립운동가의 상징처럼 되어있다. 상당수의 여성독립운동가들이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의 무관심 속에 잊힌 존재였다가 근래에 들어 발굴되기 시작했다. 유관순 열사와 일부 여성독립운동가를 제외하면, 일제강점기 대다수 여성독립운동가는 성인여성이었다. 유관순 열사보다 더 어린 나이에 독립운동을 한 여성독립운동가도 있었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독립투사를 지원한 여성독립운동가도 있었으며, 머나먼 이국땅에서 언제 올지 모를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험난한 난관을 헤쳐가면서도 군사훈련을 받고 무장투쟁에 직접 뛰어들어 순국하신 여성독립운동가도 있다. 전국적으로 약 3개월에 걸쳐 수백만 명이 1919년 3.1만세 운동에 참여하였.. 2017. 2. 26.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일제에 항거하며 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한 1919년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과 17인 1919년 3.1만세 운동 당시 기미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는 33인이다. 기미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하지 않았지만, 3.1운동이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한 비폭력 저항운동으로 만들기 위해 함께 계획하고 조직적으로 참여한 사람은 민족대표 33인을 포함하여 모두 50명이다. 일제는 1910년 국권 침탈 이후 근 10년간 무단통치로 대한의 백성을 억압해왔다.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주창, 무오독립선언, 고종황제 승하와 독살설, 2.8 독립선언 등의 분위기 속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독립운동 준비가 무르익어갔다.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은 모두 종교인이다. 천도교 15명, 개신교 16명, 불교 2명이었고,.. 2017. 2. 25.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건국 중국 상해에 수립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조국의 광복을 위해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국호와 임시헌장 선포 1919년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 선포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나라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그 뿌리를 대한제국에 두고 있다. 1910년 8월 29일 일본 제국주의의 강압으로 대한제국이 국권을 침탈당했다. 일제에 항거한 무장 항일운동은 강제병합 이후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위한 무장투쟁으로 바뀐다. 1919년 벽두부터 고종황제 승하와 독살설, 무오독립선언, 2.8 독립선언이 연이어 일어났다. 고종황제 인산일(장례일)에 예정됐던 만세 운동은 1919년 3월 1일로 앞당겨졌다. 3.1 만세운동은 독립운동 역사의 분수령이 되었고, 3.1운동을 기점으로 몇 년 전부터.. 2017. 2. 19.
민족반역자 친일파 매국노 역적 이완용 나라와 동포를 배신한 민족반역자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파 매국노 역적의 대명사 이완용 광복 70년이 넘은 대한민국 곳곳에서 아직도 일본 제국주의 망령이 활개를 치고 있다. 정체성을 찾지 못한 대한민국은 일제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혼란에 휩싸여 있다. 민족반역자 친일파 매국노 이완용과 일제의 앞잡이들은 시대를 달리하여 다른 가면을 쓰고 위장하였고, 그 후예들은 근현대 1백여 년의 시간 동안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민족반역자 친일파 매국노 이완용은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이름을 올렸다. 혹자는 나라의 주권을 팔아먹은 을사(1905)년의 다섯 역적, 정미(1907)년의 일곱 역적, 경술(1910)년의 여덟 역적에 각각 이름을 올린 민족반역자 친일파 매국노 역적 이완용을 한韓민족 역사의.. 2017. 2. 18.
3.1만세운동 기미독립선언서 1919년 3월 1일 - 3.1만세 운동과 기미 독립선언서 1919년 1월 20일 친일파에 의한 고종황제 독살설이 퍼지면서 민심이 흉흉해진다. 1919년 2월 1일 무오독립선언서(대한독립선언서), 2월 8일 일본 동경 2.8 독립선언서가 각각 발표됐다. 무오독립선언과 2.8 독립선언은 혈전(血戰)을 명시했지만, 3.1만세 운동은 비폭력 항일 시위를 선언했다. 3.1만세 운동은 비폭력 무저항 불복종의 평화적 시위를 벌임으로써 세계만방에 조선의 독립과 우리 민족의 의지를 알리려 했다. 1919년 2월 1일 무오독립선언과 1919년 2월 8일 2.8 독립선언은 국내가 아닌 만주와 일본에서 각각 발표됐다. 1919년 3월 1일 3.1만세 운동은 본래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장례일(인산일因山日)인 1919년 3월 3.. 2017. 2. 12.
대한독립선언서 무오독립선언 2.8독립선언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최초의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한 무오독립선언 일본 도쿄에서 발표한 2·8 독립선언 500여 년을 이어온 대한제국(조선)은 1910년 8월 29일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국권을 강탈당하며 나라를 빼앗겼다. 1910년은 나라를 빼앗긴 치욕스러운 해, 즉 경술(庚戌)년의 치욕이라 하여 경술국치(庚戌國恥)라고 부른다. 경술국치 이전에도 항일운동이 있었지만, 나라를 빼앗기고 나서는 일제의 강점에 해방을 위한 항일운동으로 본격적인 독립운동이 시작됐다. 1919년 2월 1일 만주 길림성에서는 무오독립선언이 발표되고,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2.8 독립선언이 발표된다. 1919년 1월 21일(음력 1918년 12월 20일) 대한제국 초대 황제이며 조선 27대 임금인 고종황제가 덕수궁 함녕전에서 갑작스.. 2017. 2. 11.
여류화가 신사임당 양반집 여인에서 신화가 된 여인 조선 시대 여류화가 신사임당 조선 시대 여류화가로 유명했다는 신사임당의 작품은 모두 전칭작(傳稱作)이라고 한다. 신사임당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이라는 의미다. 신사임당이 어떻게 대한민국 화폐 최고 고액권 주인공이 되었으며, 조선 시대 최고의 여류화가가 되었을까? 신명화(성종 7~중종 17, 1476~1522)는 슬하에 아들은 없고, 딸만 다섯을 두었으며, 신사임당은 신명화의 둘째 딸이다. 신사임당(연산군 10~명종 6, 1504~1551)의 아버지는 신명화는 41세가 되던 중종 11년(1516) 진사시(소과)에 급제하였으나 대과에 응하지 않고 진사로 남았다. 신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는 16년간 한양에서 주로 지냈기 때문에 강릉에 있던 신사임당과 아버지 신명화는 많은 .. 2017. 2. 5.
역적 홍길동 실존인물 역적(逆賊)이 아닌 도적(盜賊, 강도)의 괴수 홍길동은 연산군 시대에 실존했던 인물 조선왕조시대 태평성대를 누리던 때도 작은 도둑은 있었다. 더욱이 혼란했던 시대에는 도둑이 떼로 출몰했고, 대규모로 조직화하여 활동했다. 조선왕조는 우리가 사는 지금처럼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국가기관과 사회 지도층이란 자들이 합법을 빙자하여 광범위하고 조직적으로 불법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도적들이 활개 치는 현실과 굳이 비교하자면 조선을 멸망으로 몰고 간 조선 후기 외척세력의 삼정의 문란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시대 의금부(義禁府)는 건국 초기 왕권 확립 등을 위한 부서였으나, 왕권이 안정되면서 임금의 명으로 특정 사건을 수사하는 조선 최고의 사법기관으로, 때론 임금의 특명을 받아 실정 파악 등을 .. 2017. 2. 4.